스릴러 영화 ‘해빙’(2017)과 넷플릭스 흥행 범죄 시리즈 ‘인간수업’(2020)을 촬영하며 이름을 알린 엄혜정 촬영감독을 지난 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한 호텔의 회의실에서 만났다. 장르적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은 그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함께 진행되는 아시아영화아카데미의 촬영 멘토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아시아영화아카데미는 임권택, 허우 샤오시엔, 구로사와 기로시 등 아시아의 거장 감독으로 손꼽히는 이들이 ‘교장’을 맡아 2005년부터 매해 아시아 각국에서 모여든 신진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촬영, 편집 등 영화 제작 과정을 교육해온 프로그램이다.
엄 촬영감독은 올해 ‘촬영 멘토’를 맡아 20명의 수강생에게 촬영 전반에 대한 의견을 주고 있다.
“촬영에 정답은 없거든요.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건 천차만별이니까요. (현장에서도) 감독과 촬영감독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답이 될 뿐이죠. 그래서 틀렸다고 이야기하기는 좀 두려워요. 그냥 ‘이렇게 찍었으면 더 좋았을 거다’, ‘이 선택은 좀 더 고민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 줍니다.”
엄 촬영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조진웅 주연의 스릴러 영화 ‘해빙’이다. 한적한 신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에서 그는 어두운 화면 속의 빛을 조율해가며 극의 묵직한 긴장감을 뒷받침했다.
뒤이어 넷플릭스 시리즈 ‘인간수업’ 촬영을 맡게 된 건 “운이 좋아서”였다고 했다. 2015년 ‘해빙’을 촬영하고 2019년 다음 작품인 넷플릭스 시리즈 ‘인간수업’ 촬영을 맡기까지 약 4년의 시간을 지나 보냈다는 그는 “촬영 현장에서 감독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촬영 감독이고, (전통적으로) 그 자리는 대부분은 남자가 차지했기에 진입장벽은 여전히 있다”고 현실을 전했다.
그는 현재 한국촬영감독조합(CGK)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100명이 조금 넘는 전체 조합원 중 여자 촬영 감독은 7~8명 정도다. 10%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여전히 여성의 비율이 적다는 의미“라고 현상을 짚었다.
그럼에도 종종 의미 있는 변화를 체감한다고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영화과 입학생 중에 여학생이 더 많고, 촬영을 하고 싶어 하는 여학생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20년 전만 해도 현장에서 여자 촬영 스태프를 보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금 상업 영화 현장 촬영 스태프 4~5명 중 1~2명이 여자에요. 그 사회의 모습이 문화에 반영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사회가 함께 (조금 더) 변화해야 합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치욕의 대지’(2017)로 여성 촬영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90년 역사의 미아카데미시상식 촬영상 후보에 오른 레이첼 모리슨을 좋아한다고 했다. ‘벨벳 골드마인’(1999), ‘더 레슬러(2009)’, ‘힐빌리의 노래’(2020) 등을 촬영한 거장 메리스 알베르티의 이름도 손에 꼽았다. 로저 디킨스, 로버트 리차드슨, 김형구, 김우형 촬영 감독의 이름과 함께 언급한 여성 촬영감독들이다.
엄 감독은 “여성 촬영 감독이 액션, 스릴러 같은 장르 영화를 못 찍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아니다. 나부터도 와이어를 달거나 달리면서 찍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면서 “작품을 대하는 책임감과 잘 찍어내겠다는 욕망은 성별과 상관없이 동일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