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파와 저주파 음역대를 오가는 고래의 소리는 깊은 바다를 누비는 동족 간 소통의 도구이자 외부 세계를 인지하는 매개다. 고래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세계는 관객의 신체와 맞닿아 공감각적인 경험을 만들어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가 위기를 맞은 지금, 고래는 어떤 소리로 자신들의 세계를 전달할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에서 3월 28일까지 여는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홍이현숙: 휭, 추-푸'에서 해답을 모색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아르코미술관이 연대와 협력을 강조해왔던 것의 연장선에 있다. 그 관심이 비인간 존재들에게 확장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홍이현숙 작가는 가부장적 사회와 시선에 저항하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몸을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이야기해왔으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다. 전시 제목 '휭, 추-푸'에서 '휭'은 바람에 무언가 날리는 소리, '추푸'는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다. '추푸'는 책 '숲은 생각한다'(사월의책)에서 인용했다. 남아메리카 토착민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동물의 신체가 바람에 휘날리거나 수면에 부딪히는 모습을 의미한다.
29일 전시장에서 만난 전시를 기획한 김미정 아르코미술관 학예사는 "언어는 상대적으로 집단에 속하지 않은 존재한테는 배타적이고 소통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양면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며 "나와 다른 존재와의 소통을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보다 열린 소리, 몸짓으로 비인간 동물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긴 제목"이라고 했다.
밖에서 아르코미술관을 마주하면 유리창에 새겨진 시각화된 고래 소리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전시장 1층을 가면 고래 소리를 '왜' 이렇게 적었는지 알 수 있다. 홍이현숙 작가는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들을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고래 8종의 목소리를 MBARI(몬터레이만 아쿠아리움 연구소)가 녹음한 데이터를 변형해 전시장에서 재생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세상을 탐구하는 고래들처럼 관객은 뗏목처럼 만들어진 작가의 열린 '방'에 누워 바다를 느끼며 함께 유영한다. 이 뗏목은 작가가 현재 사는 방 사이즈와 같다. 장판에 앉으면 들리는 소리는 앉아서만 들을 수 있는 저주파 소리다. 고래는 울음소리는 하나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고래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인지 환희를 담고 있는 것인지 인간은 알 수 없다.
옆 전시실에선 이어도 실시간 CCTV를 볼 수도 있다. 작가가 논밭에서 직접 헤엄치는 모습은 모든 곳에서 바다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르코미술관은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인해 소외된 존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가시화했던 작가의 실험적인 기획과 프로젝트에도 주목했다. 2층은 홍이현숙 작가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아카이브다.
홍이현숙 작가는 "작가는 다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기획을 통해 낙후되거나 사라지는 터전과 지역민의 삶을 고민했고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재개발 지역의 골목에 남아 인간의 애정 어린 시선과 혐오의 눈길을 동시에 견디며 살아가는 길고양이 등도 전시장에 소환된다. 은평구 갈현동을 배경으로, 작가는 그들과 우리가 서로 삶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함께 헤엄치고 날아다니는 상상의 결과를 전시장에 펼친다. 작품을 통해 비인간 동물이 겪는 고통이 곧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임을 의식하게 한다.
홍이현숙 작가는 "길고양이는 누군가에겐 밥을 주고 싶은 대상이지만 누군가에겐 혐오의 존재"라며 "재개발 이후 사라질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들과 공생하기 위한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고 했다.
모래내시장에서 산 5000원짜리 '냉장고 원피스' 역시 홍이현숙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 학예사는 "공멸과 공생 사이에서 위태로운 현재, 그래서 미래를 감히 상상하기 힘든 뉴노멀(New-Normal)의 시대에 작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와의 새로운 연대와 공생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예술을 통한 상상으로 열어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