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A(31) 씨는 지난달 17일 치러진 7급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지난해 선택과목 중 지방자치론을 응시했다가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한 그는 올해엔 자신 있는 경제학원론을 선택했다. 하지만 A 씨는 선택과목의 난이도 조절 실패로 결국 낙방 위기에 놓여 있다.
10월 17일 치러진 2020년도 7급 지방직 공무원 공채(일반행정) 시험이 논란이 되고 있다. 총 3개 선택과목 중 가장 많은 수험생이 선택하는 ‘지방자치론’과 ‘경제학원론’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서 두 과목 간 평균 점수 차가 20점 이상 벌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난이도를 보정하는 조정점수조차 없어 선택과목에 따라 합격 여부가 갈릴 수 있는 상황이다.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들은 선택과목의 난이도가 확연히 다름에도 조정점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불공정’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별도의 단체를 구성해서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진정을 넣거나 불합격 처분에 대한 항고 소송 제기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글을 올려 3일 기준으로 700명 이상의 동의를 구했다.
수험생들이 문제로 삼는 부분은 ‘조정점수의 부재’다. 선택과목의 난이도가 크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오로지 원점수로만 평가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2년 이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B(25) 씨는 “공무원 시험의 당락에 ‘운’이라는 요소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이번 시험의 가장 큰 문제”라며 “수험생에게 응시과목을 선택하도록 했으면 특정 과목을 선택하는 것에 따라 당락이 좌우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 시험에서는 경제학원론을 선택한 것이 합격 가능성을 낮췄다”고 지적했다.
2일 기준 공무원 시험 전문 사이트 ‘공단기’가 취합한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 지방직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선택과목인 ‘지방자치론’의 평균 점수는 70.7점, ‘경제학원론’의 평균 점수는 49.8점으로 약 21점의 차이가 난다. 0.5점의 가산점 차이로도 당락이 나뉘는 공무원 시험에선 극복하기 어려운 큰 점수 차이를 보인 셈이다. 또, 20개의 경제학원론 문제에서 30% 이하의 정답률을 보인 문항은 4개나 됐다. 다른 선택과목인 지방자치론에서 정답률 30% 이하의 문항은 0개였다.
헌법·행정법 등을 강의하고 있는 유명 공무원 시험 강사인 황남기 교수는 “보통 1~2문제 차이로 합격 여부가 갈리는데 20점 이상의 차이는 극복이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내년엔 경제학원론이 아닌 지방자치론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 내년이라도 조정점수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점수’ 제도는 선택과목 난이도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조정점수란 응시자가 선택한 과목점수의 표준편차와 평균점을 산출해 별도의 산식에 따라 조정한 점수를 의미한다. 현재 지방공무원임용령 제50조2항에 따르면 ‘8급 및 9급 공개경쟁신규임용시험의 선택과목 득점은 응시자가 선택한 과목점수의 표준편차와 평균점을 산출하여 산식에 따라 조정한 점수(이하 “조정점수”라 한다)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선택과목 간 난이도 차이로 수험생들의 불만이 컸던 공인노무사시험도 2011년부터 표준점수(조정점수)제를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7급 지방직 공채(일반행정) 시험은 국어·영어·한국사·헌법·행정법·행정학 등 필수 과목에 경제학원론·지방자치론·지역개발론 등 총 3개의 선택과목이 있는데도 조정점수가 도입돼있지 않다. 이외에도 선택과목이 존재하는 공무원 공채 시험 중 조정점수가 도입돼있지 않은 시험은 국가직 7급(외무영사), 5급(행정직)이 있다.
지방인사제도과를 총괄하고 있는 행정안전부(행안부) 인사제도 관계자는 조정점수 도입에 대해 “7급의 경우 2010년에 선택과목제를 도입할 당시 조정점수제를 도입하려면 특정 과목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기 위해 최소 적정 응시인원이 있어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이 있었다”면서 “9급은 응시인원이 많은데, 7급의 경우엔 한 과목당 응시인원이 적다. 이에 조정점수제 도입의 타당성에 의문이 있다는 자문결과가 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과목별로 점수 차가 나는 원인은 단순히 난이도가 달라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특정 과목을 선택한 응시자의 집단 능력에 따라서도 발생이 가능한 것”이라며 “표준점수제는 응시자의 집단능력이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난이도 차이를 보정하는 것인데 집단 능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적용하면 과보정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황남기 교수는 공무원 시험을 관할하는 인사혁신처·행정안전부 등 소관 부처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수험생들이 혹시라도 문제를 제기했다가 면접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혹은 공무원이 되고 나서도 공무원 생활에 지장을 받을까 봐 무서워한다”며 “갑을 관계가 있다 보니까 수험생들의 요구사항이 있어도 반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위헌인 법령은 시정해서 국민의 기본법 보장에 충실해야지 ‘현행제도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편, 수험생들은 내년부터 7급 지방직·외무영사직 등의 과목에 대해 조정점수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난이도 조절 실패로 피해를 본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한 추가시험·재시험 등의 해결책 제시도 촉구하고 있다. 수험생 A 씨는 “선택과목에 대한 재시험 또는 추가시험이 이뤄져야 한다. 채용과정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면, 시험을 다시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근 3년간 공적 영역에서 공정성 논란이 일었던 시험의 경우 모두 재시험이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수험생들의 불만에 대해 행안부 인사제도 관계자는 “수험생들의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고 들었다. 정확한 것은 시·도별로 시험 결과가 나와봐야 분석이 가능할 것 같다”며 “이 문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관계 기관이나 인사혁신처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정점수 도입·재시험 등 가능성에 대해선 “일단은 시·도에서 선택할 문제이지만 10년 동안 동일한 규칙으로 계속해서 공고했고 시험 결과에 따라 처음 규칙을 바꾼다는 것은 규칙을 신뢰한 다른 수험생들에게까지 공정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점수 차에 대한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일단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 제도 개선에 대해 검토해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