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노동 현실을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는 ‘인간문제(人間問題)’의 작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듬해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장연(長淵)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게 된다. 열 살이 지나서야 장연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비와 학용품조차 마련하기 힘들어 눈치 공부를 하며, 어렵게 학업을 마친다. 이때의 참담했던 경험은 강경애의 작품세계를 관류(貫流)하는, 궁핍과 제도적 모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표출된다.
1921년 열여섯 살 무렵 의붓아버지가 죽은 뒤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한다. 여학교 3학년 때인 1923년 기숙사의 지나친 규칙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관련되어 퇴학을 당한다. 같은 해 장연에 문학 강연을 온 양주동(梁柱東)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다. 이듬해 강경애는 상경하여 양주동이 주관하던 금성사에 같이 기거하면서 문학공부를 하는 한편,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했다. 하지만 이 해 가을 기질과 사회인식의 차이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1920년대 후반 강경애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무산아동을 위한 ‘흥풍야학교’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서울로 출분(出奔)했던 사실 때문에 고향 사람들과 가족의 비난을 받자 1년 반 정도 간도 용정 일대에 머무르다 다시 장연으로 돌아온다. 1931년 1월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단편 ‘파금(破琴)’을 독자투고 형식으로 발표하며 등단한다. 양주동과의 만남, 근우회 활동은 소설가이자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강경애는 장연군청 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여 용정으로 이주한다. 이후 그곳에 거주하면서 이주 조선인의 현실을 고발한 ‘채전’(1933)과 ‘축구전’(1933), 항일무장투쟁의 공과를 여성의 삶과 연결지어 형상화한 ‘소금’(1934), ‘모자(母子)’(1935), ‘어둠’(1937) 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장편소설로는 여성문제를 어머니와 딸의 일대기를 통해 그려낸 ‘어머니와 딸’(1931~1932)과 식민지 시대 노동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간문제’(1934)가 있다. 1936년 가난한 농촌 현실을 극단적인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지하촌(地下村)’을 발표했다.
1939년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3년 전부터 얻은 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다. 1940년 2월에는 상경하여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고, 원산의 삼방 약수터를 다니기도 했으나 끝내 병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26일 생을 마감한다.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통 받고, 중앙문단과 거리를 둔 채 작품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여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치열한 작가정신을 일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