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바라면서도 있는 대로 깎아내리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 같은 소리 하네.” 자주 듣는 말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면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겸허하게 내리 깎으면 그게 행복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다. 행복은 대접을 잘 해 주는 사람에게 간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물론 전 행복해요”라고 하면 조금은 엉뚱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행복하게 보인다. 이미 행복이 그 사람 속으로 입주(入住)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작은 기쁨을 얕보거나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행복을 안주머니에 넣고 이 정도는 행복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푸대접하면 그 행복은 이미 그를 떠나고 없다는 것이다. 행복은 낮은 곳에서 대접받기를 원하고 작은 것을 대접해야 더 큰 것이 오게 된다는 이치다. 행복을 선반 위에 얹어 놓고 늘 없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습관이 복을 만드는 것처럼 결국 “없다”를 강조하면 없어지는 것은 기본 이치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행복 부정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직면한 위기에 대해 아주 너그럽게 반응해서 결국 평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갈채 받을 특성이 있다. 그것이 다행론(多幸論)이다. 다행은 행복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불행의 하향정지(下向停止)를 뜻한다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썼던 이규태 선생이 말하기도 했다.
어떤 시점이건 그때가 행복한 시간이라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어떠한 위기일지라도 행복을 내 안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바로 다행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넘어져 손만 부러지면 머리까지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한다. 내가 그랬다. 3년 전 눈길에서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졌는데 사람마다 똑같은 말을 했다. 다리까지, 아니 머리까지 안 다쳐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불이 나면 ‘생명은 건졌으니’라고 하고, 돈을 떼이면 ‘몸은 성하니까’라고 한다. 한국인은 다행론으로 많은 역사적 위기를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행복하지는 않으면서 다행론에 깊이 물든 한국인의 돌파력이 결국 갖은 불행 속에서도 성큼 일어설 수 있었던 내공이 되었을 것이다.
내 후배도 당장은 좌절 밑에 깔려 허우적거리다 한국인의 다행론이 가슴에 와 박힌 것이다. ‘그래 대학은 두 번 떨어졌지만 내 아들은 건강해’ 하고 말이지…. 그리고 ‘두 번 떨어졌으니 세 번째는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하늘을 한 번 보는 비슷한 습관은 분명히 한국인이 지닌 미래 확신 기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좌절보다 희망이 더 높아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행론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는가. 나는 전쟁 때 사랑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사랑은 더 큰 모습으로 모든 생물과 함께 자라고 꽃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결국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한국인의 의지를 나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