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사실 그 자체만 보도하는 저널리즘(just-the-fact-journalism)’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폭스 뉴스(Fox News) 등에서 보듯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는 저널리즘(opinionated journalism)’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미디어 종사자들이 생산하고 있는 것, 그리고 시청자/독자들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똑같은 제목에 똑같은 사실이 비슷한 포맷으로 담긴 뉴스들이다. 그것들이 너무 많아 그 더미를 헤치고 ‘유의미한 뉴스’를 찾기가 월리(Wally) 찾기보다 더 어려워졌다. 여기서 유의미한 뉴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사실이 왜 중요하며 객관적으로나 독자 개인에게나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분석하고 전망하는 뉴스를 말한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출입처 제도가 뉴스의 획일화에 기여해 온 건 기정사실. 힘과 노력이 들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파악해내긴 좀처럼 힘든 ‘맨땅의 헤딩’ 탐사보도를 하기보다는 출입처에서 제공해주는 정보를 편하게 받고 여기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논평을 곁들이면 해설 기사라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논평에는 살짝 균형을 맞춘다. 자칫 남과 너무 다른 견해를 전하거나 해석했다가 정파적이라고 몰리지 않기 위해.
제목만 달리 달고 내용은 거의 같은 기사를 ‘복붙(복사해 붙임)’해 변형하는 행위, 이른바 어뷰징은 속도가 줄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포털에 전송되는 타사 뉴스들에 밟혀 노출이 덜 되기 때문에 생긴 디지털 시대, 알고리즘 시대의 미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보도에서도 이러한 관행은 그대로 발휘됐다. 사실은 중요하다. 검찰이 피의자로 적시한 이들의 혐의를 밝히고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탄핵소추안 가결 표의 수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것은 계속 필요하다. 그러나 그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사안이 복잡해질수록 ‘빠르게’ 그리고 ‘많이’ 뉴스를 던지는 것은 (포털 노출을 간과하고 얘기할 때) 무책임해진다. 파편화된 사실 전달은 맥락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깊이 있는 해석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뉴스를 원하는 수요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역할을 해야 미디어가 공론장(public sphere) 역할을 할 수 있다. 최순실 사태에서 공론장은 미디어라기보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과 논의였다. 촛불과 광장이 공론장 그 자체였다.
미첼 스티븐스(Mitchell Stephens) 뉴욕대학교 교수는 저서 ‘비욘드 뉴스’에서 지혜의 저널리즘(Wisdom Journalism)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그동안 미디어가 신봉해 온 ‘5W(who, what, which channel, to whom, what effect)’를 ‘5I’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양 있고(informed) 지적이며(intelligent) 흥미롭고(interesting) 통찰력 있으며(insightful) 해석적인(interpretive)’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해석은 저널리즘 조직의 최우선 임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촛불의 수는 많을수록 좋은가(마치 경마 저널리즘 같지는 않았는지?), 금리인상은 무조건 경제에 독인가(인플레이션일 경우에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는데 자진 퇴진을 해야만 하는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가. 숨겨진 질문은 결코 적지 않다. 너무 많은 사실 나열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해석이다. 원해야 하는 것도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