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애국시·어록비 공원에 ‘세우자 우리나라 우리 손으로 독립한 정신없이 독립은 없다’라는 독립운동가 한훈의 글귀가 있다. 대한독립을 위해 젊음을 불사른 열혈청년 한훈(1892. 2. 27~1950. 9. 10)은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인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이끌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한훈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당숙에게 입양됐다. 그는 을사늑약 직후 친형 한태석과 함께 열여섯 살에 홍주의병에 가담했다. 한훈은 을사오적 암살이 여의치 않자 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경술국치 후 채기중과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했으며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한 대한광복회에서 친일 부자들을 납치해 군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일본 헌병대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새로운 항일투쟁을 모색하던 한훈은 광복단 결사대를 결성, 김상옥의 암살단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암살해 민족의 독립열의를 세계에 알리고자 계획했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 체포돼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극적으로 탈출한 김상옥은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결 순국했다.
광복단 시절부터 함께 활동한 한훈과 김상옥은 자녀를 낳기 전에 이미 사돈을 맺을 정도로 동지애가 돈독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하늘에서 사돈이 된다. 한훈의 딸과 김상옥의 아들은 아버지들의 뜻을 받들어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던 것이다.
한훈은 8년 복역 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출옥했다가 1929년 다시 감옥소로 끌려가 10년 추가 징역과 5년 추가 인정재판으로 2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41년 거의 시체가 돼 세상에 나왔다. 광복 후 광복단을 재건하고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던 한훈은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돼 피살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