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었다. 거울에 얼룩이 있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크고 더러운 줄은 몰랐다. 목탁에 금이 났어도 잔금인 줄 알았지 이렇게나 깊고 길게 파였을 줄은 몰랐다.
‘정직해라.’ ‘거짓말하지 마라.’ ‘남의 것 탐내지 마라.’ ‘모범을 보여라.’ 이렇게 말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 글대로는 행동하지 못함을,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성인과 현자들의 가르침일 뿐 불가능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 사람의 어긋나고 상반된 말(글)과 행동이 이렇게나 여러 사람들을 참담하게 만들고 조롱거리가 되게 할 줄은 몰랐다.
“우선 법률가들부터 전부 죽입시다요(The first thing we do, let’s kill all the lawyer.).” 셰익스피어는 초기 작품 ‘헨리 6세’에서 민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법을 아는 것을 특권으로 누리고, 법의 복잡함을 악용해 횡포와 착취, 수탈하던 법률가들에 대한 증오를 이렇게 드러냈는데, 지금 이 사회의 어디서 누군가는 ‘법률가’의 자리에 ‘기자’ 혹은 ‘언론인’을 집어넣고 이 대사를 외우면서, 외우도록 부추기고 있을 것만 같다. 글줄 좀 쓰게 된 걸 특권으로 누리고, 펜의 뾰족함을 악용해 사적(私的) 이익과 편의를 추구한 데 대한 혐오를 참을 수 없어서!
(허물이 없는 자가 남의 허물을 탓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음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라고 했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간음녀)을 돌로 쳐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가는 아무도 남의 허물을 탓하지 않을 것 같아 내 눈에도 절대 작지 않은 들보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허물을 탓해보기로 했다.)
기자의 권리, 언론의 권리는 있는 것인가? 있다면 무엇인가? 누가 준 것인가? 체코 태생의 위대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기자에게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질문에 대답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밖에 없다. 다른 권리는 없다. 그는 1994년에 발표한 소설 ‘불멸(김병욱 역)’에서 “기자란 그저 질문을 던지는 자가 아니다. 아무에게나 어떤 주제에 관해서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지닌 자다. 우리 모두가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주장을 좀 더 명확히 해보자. 즉 기자의 권력은 질문을 던질 권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는 권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이다”라고 썼다.
이 권리를 처음으로 제대로 행사한 기자는, 쿤데라도 인정했듯이, 이탈리아 출신의 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다. 그는 1969년에서 1972년까지 이탈리아 잡지 ‘에우로페오’에 게재된 당대의 막강한 권력자들과의 대담 시리즈에서 그들 모두를 ‘링 위에 케이오’로 나둥그러지게 한 업적으로 언론사에 영원할, 찬란한 이름을 새겼는데, 그의 무기는 엄정한 질문, 즉 대답을 하면 위선자, 대답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쟁이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질문이었다.
팔라치 식 권리 행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쳐 마침내 1974년 미국 닉슨 대통령을 탄핵으로 내몬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 의해 모든 기자들 최대의 무기로 자리 잡게 됐다. 다시 쿤데라를 인용하면, “질문을 통해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유력한 한 인간이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해 놓고, 이어 그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게 한 뒤, 결국 머리를 조아린 채 백악관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이후에야 언론이 비로소 정치권력과 대등하게, 어떨 때는 더 큰 힘으로 맞설 수 있게 됐다는 언론 발전사를 쿤데라는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발전해온 언론의 권리는 독자(국민)가 기자에게 모든 권력을 감시하도록 부여한 권리로, ‘특권’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과 몸담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권리는 절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수십 년 계속된 독재와 군부통치라는 거친 환경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전해온 이 특권은 조선일보의 해임된 주필이 개인적 이익과 말초적 쾌락 추구에 이용함으로써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처지가 됐다. 정말 필요한 곳에 사용하고 싶어도 꺾어진 칼, 녹슨 펜대라고 외면당하고 조롱받기 딱 좋게 됐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침해되고 위축될 줄은 몰랐다.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물러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과 조선일보 기자 사이의 통화 내용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MBC가 입수해 보도할 수 있었을까? 만일에 누군가에 의해 감청이나 도청을 통해 얻은 것을 MBC가 보도한 것이라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그 누군가는 지금은 또 누구를 감청하고 도청해서 기록으로 보관하고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기자들은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언론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보호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떤 것보다 더 본질적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과연 들을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