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어박스 에디터H입니다. 저는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오늘 아침 10시, 애플의 2016년 첫 스페셜 이벤트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답니다. 레드불 한 캔을 원샷했으니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가볍게 쭈욱 풀어볼까 해요. 물론 전 다이어트 중이니 슈가프리로 마셨어요.
아이폰SE와 9.7인치 아이패드 프로도 직접 만져보고 왔으니 지금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 중계를 즐겨주세요.
행사장에 들어가기 전에 미디어 뱃지를 나눠 받습니다. 사과 로고는 언제 봐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데가 있죠. 이 뱃지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잽싸게 목에 걸고… 놓치지 않을 거에요.
평소엔 촬영은 커녕 들어가 보기도 힘든 애플 캠퍼스가 미디어에 잠시 공개된 순간입니다. 푸르른 잔디밭 주변을 도넛처럼 두르고 있는 인피니트 루프 내부 풍경을 감상해봅니다. 아쉽게도 오늘은 하늘이 살짝 흐리네요. 왼쪽으론 애플 직원들의 구내식당인 맥카페가 슬쩍 보입니다.
제가 향하는 곳은 타운홀. 우리나라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사내 소강당 정도 되겠네요. 정확한 수용인원은 모르겠지만 제가 참여해본 애플 이벤트 중 가장 작은 규모입니다. 덕분에 굉장히 가족적인 분위기네요.
하지만 취재 열기만은 살벌합니다. 묵직한 방송국 카메라부터 아이폰으로 이뤄지는 생방송 중계까지. 얼마나 다양한 채널로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는지 그 현황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네요.
드디어, 팀 쿡 등장! 행사장 규모가 작으니 다른 행사보다 훨씬 가까이서 볼 수 있었어요. 애플 자랑부터 해야겠죠. 전 세계에 사용 중인 애플 기기가 10억 대를 돌파했다는 소식부터 시작합니다.
즐거운 소식으로 시작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금 묵직합니다. 미국 연방수사국과 아이폰의 데이터 접근권한을 놓고 벌이는 분쟁에 대한 화제였죠. 10억 대가 넘은 기기와 그에 준하는 사용자를 가지고 있는 기업으로서, 사용자의 데이터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발언에는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응원해요, 팀.
모두들 신제품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애플은 먼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풀어놓습니다. 환경과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죠. 재생 에너지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리암 로봇으로 아이폰 부품을 재활용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IT기술이 의학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서치킷과 케어킷도 눈 여겨볼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따로 자세히 풀어놓았으니 ‘애플 네가 그린 그 그림’ 기사를 참고해주세요.
애플워치 신제품은 없었지만 밴드 디자인이 추가됐습니다. 나일론 소재의 밴드가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가볍고, 튼튼하고, 예쁜데 저렴하기까지 하거든요. 실물 사진은 밑에서 보시죠.
다음 차례로는 루머로 너무 들어서 이미 익숙해져버린 아이폰SE도 소개됩니다. 보통 애플 신제품 발표회는 박수갈채까진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아이폰SE는 제품 공개 전부터 워낙 자세하게 내용이 유출된지라 긴장감이 없더군요. 어쨌든 소문 속의 그 녀석, 4인치 아이폰이 등장했습니다. 아이폰5s의 디자인에 아이폰6s의 사양을 품은 그런 제품이죠.
3월 24일부터 주문 가능하다고 하네요. 네? 우리나라에서도 바로 살 수 있냐구요? 아마추어처럼 이러지 말기로 해요. 한국은 1차 출시국에 속하지 않았답니다. 아이폰SE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밑에서 실물 사진을 보면서 나눠보아요. 4인치 아이폰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면 ‘이 기사’를 따로 보고 오셔도 좋겠네요.
9.7인치 아이패드 프로도 짐작하셨죠? 네, 나왔습니다. 누가 뭐래도 9.7인치는 가장 사랑받는 아이패드 사이즈죠. 더 작거나 더 큰 녀석이 아무리 활약한다고 해도 오리지널의 아성은 넘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애플은 휴대성을 높이고 오래된 PC를 아이패드로 대체하기 위해 이 제품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12.9인치의 아이패드 프로는 정말 강력하고 신선한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컸죠. 아이패드라고 부르기 머쓱할만큼요. 그 사실을 애플도 알아챈 거겠죠.
이 제품 역시 성능은 아이패드 프로와 거의 같습니다. A9X 프로세서에 4방향 스피커, 애플펜슬 지원 등 화려한 요소를 두루 갖췄죠. 심지어 아이폰6s와 같은 수준의 1200만 화소 카메라로 아이패드 프로보다 업그레이드된 구석도 보입니다.
트루 톤 디스플레이도 신박하네요. 사용자 주변의 환경을 파악해서 자동으로 알맞은 색온도를 연출해주는 기능입니다.
솔직히 아이패드 프로를 처음 봤을 때처럼 새로운 점은 없었는데, 여기저기 특징이 숨어있었습니다. 일단 아이패드 최초의 로즈 골드 모델이 등장했네요. 갖고 싶어요. 그리고 256GB 모델이 새롭게 추가됐답니다. 와우. 이건 뭐 PC인가요.
아담한 규모로 애플의 종교 행사처럼 진행된 오늘의 이벤트는 여기까지. 아이폰이 작아졌고, 아이패드 프로가 작아졌네요. 사실 앞서 언급한 환경, 건강과 관련 화제를 제외하고 신제품만 놓고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싱거운 변화입니다. 제품 사이즈를 줄이고 라인업만 다양화한 것을 가지고 이 정도 행사로 포장할 수 있는 애플의 능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자, 이제 함께 핸즈온 섹션으로 이동해보실까요. 사진을 욕심껏 찍어왔으니 쭈욱 넘겨보며 구경하시면 됩니다.
일단 애플워치의 신상 밴드부터 차례로 착용해보기로 합니다. 나일론 밴드는 알루미늄 스포츠 모델에도 어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 모델에도 잘 어울립니다. 물이나 오염에 강하고, 가벼운 소재라 운동할 때 착용해도 좋겠네요. 운동을 멀리한지 3개월 째인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어색하군요. 사진 속의 모델은 애플워치와 나일론 밴드의 접합 부분이 화이트 컬러로 마감되어 있는데, 밴드마다 이 부분 컬러가 달라서 포인트가 됩니다.
나일론 밴드는 총 7가지 컬러로 출시됩니다. 여태까지 출시된 애플워치 중 가장 저렴하니 이 기회에 지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 물론 저는 판매원이 아닙니다. 인센티브 안받아요.
저는 기존에 브라운 모던버클 밴드를 사용 중인데, 이 밴드도 새 컬러가 나왔길래 한번 착용해 보았습니다. 머스터드 컬러보다는 화사한 라이트 블루 컬러가 끌리네요.
제일 맘에 드는 건 왜 이제야 나온건지 원망스러운 밀레니즈 루프 블랙 컬러. 아아. 아름다워요.
9.7인치 아이패드 프로는 외관만 봐서는 사실 큰 감흥은 없습니다. 가장 익숙한 사이즈니까요. 그래도 12.9인치 제품을 쓰다가 간만에 9.7인치를 손에 쥐니 아이패드 미니를 만난 것처럼 작게 느껴지긴 하네요.
당연히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 역시 애플펜슬과 스마트키보드를 모두 지원합니다. 애플펜슬은 기존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에 호환되던 것과 같은 펜슬입니다. 애플펜슬에 대한 만족도가 워낙 높았던 만큼, 9.7인치 화면에서 펜슬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대단한 메리트로 와 닿습니다.
키보드는 9.7인치에 맞게 다시 설계됐죠. 키패드가 더 작아지긴 했지만 잠깐 써보니 키감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한 가지의 거치 각도만 지원한다는 점과 사용 방법의 직관성 면에서 스마트키보드의 한계를 느꼈던 만큼, 기존 설계를 그대로 적용했다는 건 다소 아쉽네요.
트루 톤 디스플레이를 시연해보았는데요, 설정 창에서 기능을 활성화하니 화면 색온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디스플레이 전체에 내장된 센서를 이용한다고 하네요.
이제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의 뒷면을 봅시다. 아이패드 최초로 로즈 골드 모델을 내놓았는데 뒤태를 한번 구경해줘야겠죠. 전체가 로즈 골드니까 더 예쁩니다. 핑크는 사랑이니까 무조건 예뻐요. 취향이니 존중해주세요. 카메라 센서가 바뀌고 성능이 업그레이드되며 카툭튀가 발생하긴 했는데, 로즈 골드에 넋이 나간 제게는 잘 안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점 참고하세요.
마지막 핸즈온 주인공은 그래도 오늘 행사의 간판 제품(?)인 아이폰SE입니다. 아이폰5s의 껍데기를 다시 입은 요망한 녀석이죠. 얼핏 보면 아이폰5 시리즈와 완전히 똑같아 보이지만, 실물을 자세히 보면 마감이 조금 다릅니다. 구형 모델과 같은 디자인이긴 하지만 다른 피니쉬를 적용했다고 하네요. 이건 실제로 손에 쥐어봐야 느낄 수 있는 차이일 것 같습니다. 애플 로고의 마감 방식도 바뀌었고, 홈버튼 크기도 미묘하게 다릅니다.
오랜만에 4인치 제품을 손에 쥐어보니 뭔가 어색하네요. 한 손에 싹 들어가는 사이즈 보이시나요. 화면 어디든 엄지손가락 하나로 터치할 수 있는 여유로움!
정확한 사이즈가 잘 느껴지지 않으실 것 같아서 비교샷을 준비했습니다. 4.7인치 아이폰6s와 4인치 아이폰SE를 나란히 두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네요. 아이폰6s가 원래 이렇게 큰 제품이었나요.
이번엔 뒷모습과 옆모습도 비교해 봅시다. 사실 아이폰SE에 아이폰6 시리즈가 아닌 아이폰5 시리즈의 디자인을 입혔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이폰6s와 같은 프로세서를 채택할 정도로 판박이 모델인데, 껍데기는 더 구형 모델에서 따오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전반적으로 아이폰6보다 아이폰5의 디자인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4인치에는 4인치에 걸맞은 디자인이 있다는 내부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오랜만에 봐서인지 이 디자인이 예쁘긴 하네요. 눈에 거슬리는 절연선 없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디자인과 모서리의 매끈한 커팅은 애플의 역작이죠.
메시지 앱에 들어가서 Kim에게 인사를 전해봅시다. 그러고 보니 시연용 아이폰SE에 설정된 친구 이름이 우연치 않게도 Kim이네요. 한국 기자가 쓸 걸 예상이라도 한 듯이. 두 손으로 폰을 잡고 글씨를 입력하는데, 손과 손 사이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어색할 정도입니다. 한 손으로 타이핑해도 충분하네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손 문자질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역시 4인치 화면과 제 손크기의 ‘손궁합’은 딱 맞아요. 여자 손에는 4인치까지가 제일 편안하죠. 눈으로 보는 화면이 비좁다고 느끼면서도, 손은 편안함을 부정하지 못하네요.
카메라 앱에 들어가 보면 화면이 작아도 라이브 포토 기능까지 소화해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3D 터치는 지원하지 않는 터라 그냥 길게 화면을 탭하는 동작으로 라이브 포토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아이폰6s 보다 떨어지는 기능을 찾기 어렵습니다. 4K 촬영도 가능하고, 모든 동작 속도도 매끄럽네요. 아이폰SE 핸즈온 소감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길게 말하고 싶어도 크기 외에는 아이폰6s와 거의 똑같기 때문에 더 할 얘기가 없네요.
[건물 내 곳곳에 붙어있던 스티브 잡스 사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네. 실제로 혁신은 없었습니다. 완전히 판갈이된 아이폰7을 공개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기존 아이폰이 가지고 있던 특징들을 적절히 섞어 만든 재활용 제품에 가까웠죠. 실제로 제품을 소개하는 애플의 태도도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중요한 내용만 간략하게, 빠르게 스치듯 소개하고 넘어갔습니다. 하드웨어 소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애플을 제외한 다른 평범한(?) 제조사가 그러하듯 플래그십 제품이 아닌 번외 제품엔 같은 공을 들일 수 없죠. 물론 다른 제조사 같았으면 번외 라인업을 대상으로 신제품 발표회까지 열지도 않았겠지만. 뭐, 애플이니까요.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이에요. 다른 제조사들은 신제품 발표회를 위해 제품 반쪽을 분리해내고 화면이 두 개가 들어가는 등의 드라마틱한 혁신을 준비하는데, 애플은 고작 사이즈 하나 줄인 것 가지고 온 세상이 관심을 가지니 말이에요. 그게 욕이든 칭찬이든 말입니다.
점차 라인업이 복잡해지면서 애플만의 쿨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글쎄요. 애플도 결국 물건을 파는 회사니까 팔릴 만한 물건을 좇아 변화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물론 판매량이 이 변화를 받쳐줘야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요. 새로운 제품이 특정 소비자층에 어필하고 선택지를 넓힌다면 다양화를 마다할 이유도 없겠죠.
누군가는 iOS 기기를 선호하지만, 대화면 제품은 선호하지 않는데 애플이 화면 크기를 키우는 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순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증거로 벌써 ‘혁신은 관심 없다. 나는 사겠다’라는 부류들이 제 주변에 속속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운동하면서 쓰기엔 아이폰6s는 너무 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기존에 아이폰 5s 이전의 구형 모델을 쓰고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4인치를 고수할 수 있음에 기뻐합니다. 역시, 이런 틈새시장이 있었던 거군요. 틈새라고 하기엔 좀 큰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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