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흉노를 몰아내고 이 지역에 건설한 것이 바로 한사군(漢四郡)인데, 당시 정반대 지역인 동쪽 끝 한반도 접경지역에도 한사군이 설치된다. 한편, 당시 흉노와의 전투 중에 명장 곽거병은 흉노의 태자를 사로잡는데 이분이 김일제(金日磾)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흉노 출신답게 말을 잘 다뤄 마감(馬監)이라는 벼슬을 받고, 이후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받는다.
이...
그리고 그 근거로 한사군(漢四郡)을 북한 일대로 보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북한 정권의 변고 시 중국은 북한에 대한 개입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한반도 한사군설은 각종 1차 사료들에서 일관되게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한반도 설의 유일한 근거인 유물들은 이미 공중파에서 진실성이 부정된...
황경문 교수에 따르면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 문명에 흡수된 것에 가까웠던 시기는 중국 한나라 때 ‘한사군’이라는 제도를 통해 고구려 지역 일부를 점령했던 때와 13세기 고려 시절 몽골이 중국과 한국을 모두 지배했을 때 두 시기 밖에 없다.
트럼프의 시 주석 발언에 대한 묘사는 중국의 국수주의 버전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고 WP는 꼬집었다. WP는 또 한국과...
한반도 한사군 설은 20개가 넘는 전 세계 1차 사료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만주로 확장된 신라, 고려, 조선의 역사 자료는 왜 무시하는가. 역사 기록들의 존중이 역사의 근본이다.
북핵과 통일은 역사 바로잡기와 직결된 문제다. 국민들의 관심과 지도자의 역사 의식이 북핵과 북한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이 아닌가 한다.
이덕일 역사학자·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즉...
식민사관의 핵심이론 중의 하나인 ‘한사군=한반도설’을 입증하는 중국 사료는 전무하다시피한 반면 한사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속출했다. 정상적인 나라의 정상적인 학계였다면 ‘한사군=한반도설’은 이미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에서 왔다는 기자(箕子)를 높이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만들었고 조선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보자. 이 주장은 결론이 같은데도 학파가 다르다고 떼를 쓰는 데 불과하다. 조선 후기 일부 실학파 학자가 식민사학자들과 같은 주장을 했다는 것이 그 논거다. ‘한사군=한반도’ 설을 차마 실학이라고 명명하지 못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인가? 조선 후기 일부 유학자들이 기자 존숭...
다음은 기자와 위만의 성격과 활동지역, 한사군의 위치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기자(箕子)는 고대조선 서편 변방에 망명해 제후가 된 실존 인물이다. ‘사기’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는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아니었다고 했다. ‘진서(晉書)’ 권12 ‘지리지’ 상(上)에는 “조선현은 주 무왕이 기자를 봉했던 땅을 말한다”고 기록돼...
하나는 한사군 한반도설로서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임나일본부설로서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관은 한국사를 모두 반도에 가둔 반도사관인데,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음에도 한사군 한반도설은 아직껏 유지되고 있고, 임나일본부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으로 조금...
한국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중국의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 북부를 차지했고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쪽을 경영했다’는 일제 식민사관이 아직도 역사학계에 남아 있다. 추격에서 창조로의 패러다임 전환에 역사는 미래 창조의 거울이다. 왜 역사 광복이 필요한지 살펴보자.
티베트, 베트남, 위구르 역사의 인터넷 검색 결과는 이들 국가 대부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