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경주 교동에 터를 잡은 최부자 가문의 3대인 최국선은 ‘가문 주변에 굶어죽는 사람이 절대로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해 곳간 문을 열었다. 흉년이 극심할 때에는 경상북도 인구의 10% 전후에 이르는 엄청난 백성들을 구제했다.
1910년 국가 주권이 일본 제국주의에 넘어갔을 때에는 후손 최준(12대)은 백신상회라는...
경주 최부잣집 종손인 최염 옹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는데 그 손자인 최국선부터 만석꾼이 되었고 청백리의 후손으로 ‘청부’의 정신을 이어왔다”고 말한다.
요즘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무엇을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때일수록 ‘결정적 변신’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최부잣집의 토대를 세운 최국선(1631~1681)은 처음부터 존경받는 부자는 아니었다. 최국선도 처음에는 당시 관행대로 8할의 소작료를 받거나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2배를 받는 장리를 놓았다. 어느 날 도적질을 일삼던 ‘명화적’이 횃불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다. 횃불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다는 것은 신분 노출을 작심한 것이다. 최국선은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최부잣집 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이 병자호란 때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해 전사했던 일이나 3대조 최국선의 명화적(明火賊) 침범 이후 각성한 점, 동학혁명 때 11대조인 최현식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행동은 유사참연의 정신을 잘 나타낸다.
최진립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충청감사 정세균의 만류를 뿌리치고 69세의 노구에도...
그의 장남인 최국선은 선대의 농업장려를 계승해 버려진 땅을 더욱 많이 개간해 옥토를 늘려 재산을 크게 늘렸다.
당시에는 논에 직접 씨를 뿌려 벼를 재배하는 방식이었다. 최부잣집은 경주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모내기법인 이앙법을 도입해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앙법이 보급되려면 먼저 수리시설이 잘 돼 있어야 한다. 이에 최부잣집은 보와 도랑신설 등...
상생공존의 원칙을 가장 잘 나타낸 사례로는 최부잣집 만석 부자의 기틀을 다진 최국선(1631~1682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버려진 땅을 개간해 옥토로 만들어 재산을 늘렸지만 노년에는 재산을 모으기보다 친척과 향리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돈을 썼다고 한다.
최국선은 돈을 빌려 주고 담보로 받은 문서가 서랍에 가득했으나 절대 독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최부잣집이 만석꾼 부자로서 사회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대손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손자인 최국선(1631~1682)부터다. 당시 그는 지주가 소작인에게 농지를 빌려주고 8할이나, 심지어 9할을 소작료로 거둬 가던 시절 파격적으로 5할만 받아갔다. 최국선이 처음부터 5할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느날 도적질을 일삼던 ‘명화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도적 무리...
최 회장의 10대조인 최국선씨는 소작을 주고 장리(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쳐서 받는 것) 등으로 재산을 늘려나갔다. 농사를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과감히 전환한 것도 곳간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최 씨는 빌려준 곡식이 제대로 상환되지 않자 처음엔 임차인들이 괘씸했지만 이웃들이 굶어죽는 광경을 보고 ‘혼자 부자로 지내도 마음은 편하지 않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실존인물인 최국선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현 시대를 사는 대중들에게 진정한 리더십을 일깨워줬다.
이날 최국선(차인표 분)은 명화적을 뒤에서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최국선의 연인이었던 한단이(한고은 분)의 아버지인 장길택(정동환 분)이 한양으로 끌려가는 그의 앞에 나타나 명화적을 도운 진짜 배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