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 유래 / 인절미
공주 공산성에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왔을 때 농부 임씨가 바친 떡이 맛있다며 ‘그것참 절미로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
☆ 유머 / 유머의 미덕
만 24개월 된 아들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자 엄마가 대견스러워 “아가야. 넌 아직 글씨도 모르는데 어떻게 편지를 다 쓰니?”라고 물었다.
아들의 대답.
“괜찮아...
40대가 되어선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을 겪었고, 50대에는 병자호란 등 난세란 난세는 전부 경험했다.
물론 우리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 할 말은 있다. ‘아프니까 청춘’, ‘아프지도 못하는 중년’, ‘죽을 수도 없는 노년’. 지금을 사는 모든 세대가 ‘사는 게 고통’이라고 몸부림친다. 나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40대가 겪은 사연이란 사연은 다 겪고...
충북 충주시(혹은 평남 개천군)의 무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24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해 일등공신이 됐다. 정묘호란이 나자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돼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지었다. 명나라 조정에 반대해 난을 일으킨 반란군을 토벌해 명나라에서도 벼슬을 받았다. 병자호란 땐 백마산성에서 청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청군이 성을 우회해...
하지만 이괄은 홍주원과 정명의 세력을 옥에 가둔 뒤 “옥사에 갇힌 지아비와 중신들이 차례로 끌려나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며 더욱 강도높게 정명을 협박했다. 정명은 홍주원이 참수에 당할 위기에 처하자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라”고 말하며 오열했다.
정명의 오열에도 이괄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정명공주는 “원하는 것을 내어주겠다”며...
17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 37회에서는 이괄의 난으로 조선이 함락된 모습이 그려졌다.
인조(김재원 분)와 정명공주(이연희 분)를 위험에 빠트린 이괄(유하복 분)은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키게 됐다.
이날...
한편 인조를 동망케 한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커다란 공을 세웠으나 반정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인정, 한성부윤에 임명되는된 데에 불만을 품고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복한 왜병 100여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다만 일부에선 이괄이 아들을 체포한 집권층에 반발해...
11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서는 김자점(조민기 분)이 인조(김재원 분)에게 이괄의 난을 맞아 파천을 제안했다.
김자점의 제안에 인조는 크게 분노하며 “나보고 궁궐을 버리고 도망치라는 임금이 되라는 것이냐. 백성들을 잊으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이에 김자점은 “속히 결단을 내려라. 전하를 보위하고자 하는 소신들의 충심을 헤아려달라”고 재촉했다....
‘화정’ 김재원이 이괄의 난을 피해 파천을 예고했다.
MBC 월화드라마 ‘화정’ 측은 11일 이괄(유하복 분)의 난이 시작되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인조(김재원 분)가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파천을 준비하는 스틸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 인조는 홀로 마차에 타고 있다. 특히 인조의 굳은 표정은 그의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궐을 빠져나가려는 인조의 앞에...
조선시대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큰 반란 사건만 해도, 1453년 함길도 도절제사였던 이징옥의 난,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이시애의 난, 1624년(인조 2년)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 1811년 평안도 출신의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경래의 난 등 조선시대 소요 사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반정공신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떠나 피난해야 했고,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에 패해 오랑캐라 부르던 후금에 치욕을 겪었다. 백성들은 수시로 피난길에 오른 비겁한 왕을 싫어했고, 공신들은 왕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의심이 많았던 그의 신경질과 불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가,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며 무서운 망상에 시달린다. 자신과...
또한 1624년 ‘이괄의 난’때 인조 임금 일행이 남도지방으로 피난하면서 허기와 갈증에 지쳐 이 일대에서 급히 쑤어온 팥죽을 말 위에서 마시고 부랴부랴 과천으로 떠났다고 설도 있다.
2009년 4월 20일 화양동으로 으름을 바꾼 모진동은 조선시대 이 일대에 양마장이 있었다. 방목된 말이 실족해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수렁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