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남달랐으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아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에 뜻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의 나이 24세에는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하여 연경(베이징의 옛 이름)에 머무르면서 당대의 대학자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하며 금석학의 기본과 서법의 학문적 체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연암집 권1 초정집서(楚亭集序)에 썼다. “옛것을 본받은 이들이 옛것에 구속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들은 그 불경(不經) 됨을 걱정한다.” 고문(古文)을 단순히 모방하는 방고(倣古)를 가장 경계한 박지원이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도 근본을 잃지 않는 문장법으로...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선수 선생의 고문헌 1200여 점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기증받은 모든 자료를 디지털화해 이전 미공개 자료까지 공개할 방침이다.
국립암센터 의사 박원서 씨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5층 고문헌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박선수 선생의 고문헌 1208점을 기증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기증자의...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명언
“글 안에 담겨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림으로써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없는 글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다 하더라도 잡음일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소설가. 청나라 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며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쓴 그의 기행문...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 선생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읊은 시가 있다. ‘억선형(憶先兄:먼저 가신 형을 그리며)’이라고도 하고, ‘영계(映溪:시냇물에 내 모습 비춰보며)’라고도 하는 시이다. “내 형의 얼굴과 수염, 누구를 닮았나? 아버지 모습 꼭 닮은 형이기에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형을 바라보곤 하였었는데. 이제는 형의 모습이 그리우니...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난 불우한 천재인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중국을 네 번 다녀온 그는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 통상무역을 역설하며 “청(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 저서는 ‘북학의(北學議)’. 그는 오늘 세상을 떠났다. 1750~1805.
☆ 고사성어...
문익점 외에도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충무공 이순신 등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역사적 사료와 논문까지 찾아 공부할 정도로 조예가 깊다는 것. 특히 기업 인사 제도에 독서 승진제를 도입할 정도로 소문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윤 회장은 2016년 10월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일본에서 사들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는 등 역사를 통한 사회공헌에도 힘써...
까짓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사는 결별쯤이야 고통이라고 할 게 못 된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표현한 생이별의 참혹함과 처절함이다.
인생살이에서 가족과의 생이별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생사 여부도 모른 채 누렇게 바랜 사진 속 희미한 기억만을 붙잡고 살아가던 이산가족들이 만났다. 92세 노모는 71세 아들의 주름진 볼에 하염없이 얼굴을 비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첫 문장만 읽었는데도 더위가 저만치 물러난 듯하다. 연암 박지원이 강조한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한 척독(尺牘, 짧은 편지)에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느니 차라리 바늘을 잡고 눈동자를 겨누어라’라는 아이들 말이 있다”고 썼는데, 눈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런 글을 쓰시지 않았겠지요.
연암보다 약간 이른 시대를 살았던 로렌스 스턴이라는 영국 소설가도 “눈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분명한 획을 그어, 형언할 수 없는...
반면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접선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로부터 배워 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접선은 흔히 ‘줄부채’라고 부른다. 주름으로 줄이 접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줄부채는 틀린 말이다. ‘쥘부채’가 맞다. 손 안에 쥐고 다니는 부채라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다. 그렇다고...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청심환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1780년 요동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연암은 일행보다 뒤에 갔다. 길가에서 참외를 팔던 노파가 연암에게 조선 사람 40~50명이 참외를 하나씩 가지고 돈도 안 내고 가버렸다고 호소한다. 연암이 우두머리에게 돈을 받지 그랬냐고 되묻자 노파는 돈을 달라고 했다가 참외로 면상을 맞아 아직 얼굴에...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연암 박지원의 반남박씨 집안과 창애 유한준의 기계유씨 집안은 긴 세월 원수였어. 창애 유한준은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모으게 되나니…”라는 말의 주인공(“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운운은 잘못 알려진 말)이야. 그런데 홍문관 대제학이었던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향시(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창애의 현손 유길준(‘서유견문’의 저자)을 불러...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초정집서’에 나오는 말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전통공예의 가치는 그대로 살리면서 시대에 맞게 진화된 전통장인들의 공예품을 선별, 전시했고, 이 전시에 소개된 우리 공예품은 관람객은 물론 세계적 예술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전시 작품의 대부분이 현지의 유명 컬렉터 및...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은 그의 실학사상이 집약된 한문소설이다. 묵적골의 선비 허생은 10년 계획으로 공부를 하다가 아내의 성화에 중단하고 돈 벌이에 나선다. 한양 갑부 변씨(卞氏)를 찾아가 빌린 만금으로 과일 말총 등을 매점매석(買占賣惜)해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도적들을 모아 무인도로 들어간 허생은 농사를 지어 수확한 양곡을 일본 나가사키...
연암 박지원은 “벗은 제2의 나”라고 했다. 담헌 홍대용에게는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는 말도 했다. 두보가 이백을 생각하는 시에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고 한 이후 이 말은 멀리 있는 벗을 그리는 성어가 됐다.
이덕무의 이런 글은 어떤가.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1998년부터 이듬해까지 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그에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선정된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지원은 과거에 낙방하고 스스로 학문을 깨치기 위해 북경과 열하에 가서 직접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돌아왔죠.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고요. 사실 문화라는 것이 그래요. 어떠한 법칙이나 이론으로 국민들을 일부러...
그는 “여행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연암 박지원 선생 같은 경우 글을 안 남겼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유명해지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제 여행기를 남기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손자에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멋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그는 “공학을 하던 사람이라...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ㆍ1737~1805)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찬탄한 사람이 있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저작물이 많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감각과 발상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독창적 문장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론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