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심사위원장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마르크스에 정통한 좌파 도시학자, 그가 공동 심사위원장으로 되어 있었다.
아찔했다.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도시를 물리적 구조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그는 적임자 중 적임자였다. 문제는 ‘좌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용능력이었다. 당장 주요 언론부터 그냥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보고자에게도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바로 문제가 될 것 같아서였다. 호기심에 심사현장에 한 번 가보기는 했다. 그러나 이때도 하비와는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다행히 하비 위원회는 큰 관심이 주어지지 않은 채 일을 했다. 그리고 둥근 원 모양의 환상형 구상을 공동 1위로 선정했다. 탈중심적 구조에 녹지가 가운데를 차지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을 지배하지 않는 구도, 그러면서도 다 같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구도였다.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주 어느 학회 세미나의 기조강연을 위해 세종시에 갔다. 넓은 녹지에 잘 어우러진 구조물들, 곳곳에서 명품 도시의 기운이 느껴졌다.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국립도서관 식당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하던 학자들에게 장난을 건넸다. “이 정도면 골수 좌파들을 내리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잘 알고 있다. 불만 또한 적지 않다. 교육환경은 열악하고 의료시설과 문화시설은 부족하고 쇼핑하기도 어렵다. 지난해 말 어느 언론사가 세종시에 근무하는 공무원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9%가 살기 불편하다고 대답했다.
도시설계에 대한 불만은 더 크다. 응답자의 96%가 아예 설계가 잘못된 도시라 했고, 30%가 지금부터라도 전면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도로교통 부문에 대해서는 65%가 불만을 표시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시간 문제라는 사실이다. 과천청사 이전 당시의 과천시와 지금의 과천시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비가 오면 장화를 신어야 외출할 수 있던 도시가 이제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세종시는 아직 반도 완성되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좋아질 것이다.
또 하나는 사는 방법의 문제이자 가치관의 문제이다. 꼭 지금껏 살던 대로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조금 달리 살겠다고 마음먹으면 불편도 불편이 아닐 수 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설계한 건축가 고 정기용 선생의 말을 소개한다. 집이 아파트처럼 편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한 답이다.
“도심 아파트 개념의 편리함이 아니라…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도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야 하고… 식사를 하거나 집무실로 이동할 때도 산을 바라보거나 공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집을 생각했다.”
불편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의미의 안락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차를 타지 않고 걷고, 저녁 약속이 줄어든 만큼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같이 공부를 하는 등 새로운 도시에 맞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비는 2011년 쓴 마르크스의 ‘자본론(A Companion to Marx’s Capital)’에서 앞서의 국제공모 심사경험을 적고 있다. 그러면서 이 새로운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일상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을 따라 물어보자. 세종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새로운 양식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또 어떤 도시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초가을 하늘에 쉽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