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으로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자이나 개인주의자인 저자는 일본 사법부가 정교한 관료주의의 덫에 빠져들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일본 헌법 제76조는 “모든 재판관은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그 직권을 행하고 이 헌법 및 법률에만 구속받는다”다. 하지만 실상은 요령껏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만 급급하다는 것이 저자의 비판이다. “일본의 재판소는 큰 틀에서 보면 ‘국민과 시민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며 장치’인 셈이며 그런 도구, 장치라는 면에서 매우 잘 만들어져 있다.”
책은 모두 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아주 비판적이다. △내가 재판관을 그만둔 이유 △최고재판소 판사의 숨겨진 맨얼굴 △감옥 속의 재판관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재판인가? △재판관의 불상사와 추행사건 △지금이야말로 사법을 국민과 시민의 것으로 등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법제도의 개혁이 관심을 끌곤 했는데 대다수 국민들은 ‘그게 뭐가 중요한가’라는 의문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은 커리어 시스템의 문제점에 주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륙법을 선택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영미법을 선택하는 나라와 달리 ‘커리어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커리어 시스템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젊은이가 사법 수습을 거쳐 그대로 재판관이 되는 관료재판관 시스템을 말한다. 반면 영미법 체계하에서는 상당 기간 변호사 등의 법률가 경험을 쌓은 사람 중에서 재판관으로 선임되는 ‘법조일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커리어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말았는지를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지적이다. 공통된 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에 의하면 커리어 시스템하에서 재판관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독립적 판단을 내리는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사건 처리에 쫓기는 재판부의 고급관료가 되어 버린다. 저자는 “재판관들이 정신적 노예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시스템의 가장 거대한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재판관을 두고 저자는 ‘넙치 재판관’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넙치 재판관은 인사권을 거머쥔 위의 눈치나 보는 재판관을 말한다.
나는 우리 사법부는 일본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10여년 전 한 판사가 우리 사법부의 문제점을 “우리 법원의 가장 큰 문제는 판사의 지나친 관료화 현상이며 이를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법관의 임용방식을 개혁해 영미식의 법조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칼럼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 사법부의 고질적 문제들은 우리 사법부의 내부 개혁에도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법부가 한 사회의 근간 중 하나임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