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로 기업의 주가를 호령하던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고액 연봉자의 대열에 우뚝 서며 전문직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애널리스트들이 점차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증권사들의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는 가운데 영업직에 이어 2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말 기준 64개 증권사의 애널리스트 수는 1274명이 등록돼 있다. 지난 2012년 말 1455명에 비해 181명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조정 여파로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분위기도 냉랭해졌다. 2000년대 증권업 호황에 힘입어 승승장구를 이어가며 활기가 넘쳤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2000년대 들어 애널리스트란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펀드매니저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며 증권가에서 고부가가치를 생성하는 ‘싱크탱크(Think Tank)’로 자리매김했다. 전문직, 고액 연봉, 희망직업 1순위, 결혼정보회사 1등 신랑감 등 늘 화려한 수식어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증권업이 침체기로 접어들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수익 부서가 아닌 비용 부서란 인식이 보편화되며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의 뒤안길에 서 있는 이들을 기다리는 건 때아닌 구조조정의 매서운 한파다.
A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증권사 수익이 악화되면서 업계에서도 이직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팽배해져 있다”고 말했다. “자신도 구조조정 리스트에 포함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애널리스트의 현주소는 어떨까? 대부분 오전 7시까지 출근해 퇴근은 일러야 밤 12시, 밤을 새는 날도 부지기수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주 40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법정 근로시간도 이들에겐 예외다. 주말에도 출근을 하고 있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평일 하루 일과는 모닝 미팅으로 시작한다. 국내시장과 간밤 해외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시황 및 전망, 이슈, 투자전략, 섹터 및 종목 분석 등 주요 사항들을 발표하는 시간이다. 그 이후 리포트 작성과 프레젠테이션, 투자설명회, 강연회, 세미나, 기업 탐방 등에 나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기계발과 여가시간 등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가족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존재성은 약화됐고 주변의 따스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으며, 심지어 경조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도 잊은 지 오래다.
B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천직으로 느끼며 오랜 시간 몸담았지만 직업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고 운을 뗐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가면 가족들과 마주할 시간조차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일 때문에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주변 친구들과도 소원해졌다”며 한탄을 늘어놨다.
변수가 많은 시장 환경 속에서 정확한 증시 전망을 내놔야 한다는 부담감도 이들을 옥죄고 있다.
C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시장 전망 예측이 틀렸을 경우 투자자들의 협박도 잇따른다”고 언급했다. “항의성 전화가 빗발칠 때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며 스스로 갖는 자괴감도 크다”고 설명했다.
애널리스트의 영향력도 눈에 띄게 약화됐다. 과거 분석력에 무게를 두며 주가 전망을 내놨지만 기업들의 입김이 반영되며 그들의 기호에 맞는 리포트를 쏟아내면서 신뢰도에도 금이 갔다. 투자자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리포트 가치보다 양에 치중하고 있어 애써 발간한 자료들이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고 폄훼했다.
D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애널리스트가 갑(甲)이던 시대는 지났다”며 “현재는 기업의 힘에 밀려 정(丁)으로 내려갔다”고 밝혔다. “매수 리포트를 내야 하는 것이 통설”이라며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도 의견을 내지 못하는 현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E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예전에는 리포트에 따라 해당 기업 주가가 반응했지만 지금은 리포트의 질을 높일 만한 시간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기업과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체질 변화에 나서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분석력이 정보력보다 우선돼야 하며, 장밋빛 전망만 늘어놓던 관습에서 벗어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증권업이 다시 호황기를 맞으면 애널리스트들이 재평가받을 수 있다”며 “실력으로 평가받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