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때 서울을 동북아 금융 허브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자산운용업을 전략 업종으로 삼고 카이스트에 금융전문대학원을 만드는 등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현재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서울이 동북아의 금융 허브, 즉 동북아의 금융 중심지가 된다는 것은 서울에 잘 작동하는 국제금융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국제금융시장이 잘 작동되려면 그 지역에 돈이 충분히 있거나 세계 여러 곳에서 돈이 모여야 하고,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모이거나 투자 대상이 많아야 한다. 이런 지역이나 국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보유자산이 안전하게 지켜지고, 금융거래가 명료하고 거래비용도 저렴하다. 또한 금융인이나 투자자의 의사소통이 잘되고 이들의 거주나 근무가 편해야 한다.
현재 세계를 주도하는 국제금융 중심지는 뉴욕과 런던이다. 뉴욕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정치·경제력과 크고 효율적인 자국 금융시장을 바탕으로 형성된 세계 최대의 국제금융시장이다. 런던은 탄탄한 금융 인프라에다 외국 통화의 거래에 대한 규제 철폐를 통해 외국 자금·금융기관을 유치했고, 이러한 자금을 외국인의 수요자에게 싸고 편하게 제공하는 역외 국제금융시장의 대표다. 뉴욕과 런던 외에도 특정 지역·금융업무에 특화된 국제금융시장도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싱가포르와 홍콩이,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크푸르트가 해당지역의 대표적 국제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액 자산가를 위한 금융을 주도하는 룩셈부르크와 스위스, 이슬람 금융의 중심지인 콸라룸푸르, 파생상품시장을 선도하는 시카고 등도 의미 있는 국제금융 중심지다.
이들 외에 미래의 국제금융시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상하이다.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력과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뉴욕과 같이 국내 금융시장을 국제화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쉽진 않겠지만 언젠가 상하이가 뉴욕과 견줄 수 있는 국제금융 중심지가 될지도 모른다. 서울도 앞으로 잘 작동하는 국제금융시장을 가질 수 있다면 국민경제에 좋은 점이 많다. 괜찮은 일자리가 늘어나고, 실물경제가 더 원활히 돌아갈 수 있고, 도시의 위상도 높아진다. 그러나 일본이 오랫동안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지위를 유지했음에도 도쿄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존재감이 없듯 한 도시가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는 것은 나라를 산업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서울은 숙련된 인력, 잘 갖춰진 교통과 통신 등의 인프라, 활발한 실물경제 기반 등의 강점이 있지만, 남·북 대치라는 지정학적 위험과 함께 외국인의 거주와 교육 등이 불편하다는 약점도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점은 금융에 대한 규제가 불투명해 금융거래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은 금융규제의 많은 부분이 법과 원칙, 국제적 모범 관행보다는 관료들의 자의적 해석과 지시에 의해 이뤄진다. 외국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규제가 많고 강한 것보다 어떻게 적용될지 모르는 것이 훨씬 더 사업 하기 어렵다. 이것이 외국계 금융기관이 한국을 동아시아 지역의 허브로도 선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서울을 국제금융 중심지로 만드는 것은 5년이라는 한 정부의 임기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가 1990년대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힘을 합쳐 노력, 이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도 지금부터라도 다시 도전해 보자. 국제금융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고, 금융규제의 불투명성 등의 걸림돌을 조금씩 제거해 보자. 특히 관료에 의한 자의적 금융규제를 줄이는 일은 최근 문제가 되는 관피아 척결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가시적 성과는 몇 개의 정부를 거친, 10~20년 후에나 조금씩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길게 보고 씨앗을 뿌려야 나라가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