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스웨덴 최초의 민간은행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을 설립했고, 2대째인 크누트 발렌베리가 건설ㆍ기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3대째인 크누트의 조카 야코프와 마쿠스가 전자업체 에릭슨을 사들여 오늘날의 그룹 체제를 갖췄다. 현재는 5대째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스웨덴 2위 은행인 SEB와 세계 2위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항공ㆍ방위산업체 사브 등 금융과 전자, 통신, 자동차, 항공, 건설, 제약 등 스웨덴을 대표하는 기업 19곳을 포함해 100여 개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스웨덴 주식시장의 시가 총액 40%를 차지하고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스웨덴 최대 기업이다.
삼성그룹이 롤모델로 지목했던 발렌베리 가문(Wallenberg family)이 150년 동안 경영세습을 하고 있지만, 국민적 사랑을 받는 것은 철저한 검증과정을 통한 후계자 선발과 이익의 85%를 법인세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대학, 도서관, 박물관 등 공공사업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그룹의 후계자가 되려면 까다로운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혼자 힘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강인한 정신력을 키우며, 부모의 도움 없이 세계금융 중심지에 진출해 실무 경험을 쌓고 국제금융의 흐름을 익혀야 한다.
10년 넘게 걸리는 길고 까다로운 검증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후계자가 될 수 있다.
특히 발렌베리 가문의 150년간 변하지 않은 후계자 양성 원칙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2명의 후계자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 승계 프로그램도 모범 사례로 꼽힌다. GE는 이사회에 경영발전보상위원회(MCDD)를 설치하고 위원회를 통해 CEO 후보군 20여 명을 선발한다. 그런 다음 2년간 이사회가 후보자를 심층 인터뷰하고 다방면으로 평가해 후보자를 10명 이내로 압축한다. 이사회는 이후 후보자를 대상으로 다시 3~4년의 직무 순환교육과 경영능력 평가를 거쳐 최종 후보 3명을 선발한다. 6년이라는 긴 CEO 승계 프로그램을 통해 최고경영진(CEO)이 선정된다.
이 같은 피 말리는 검증 과정을 거쳐 잭 웰치 전 CEO도, 제프리 이멜트 현 CEO도 선임됐다.
발렌베리와 GE의 후계자(CEO) 선발 프로그램은 가족경영을 하는 국내 재벌그룹은 물론 확실한 대주주가 없는 신한, KB, 하나 등 금융지주도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지만 사실 우리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지난 2년간 4대 금융지주 회장이 대거 교체됐다. 2012년 3월 김승유 하나금융 전 회장이 퇴임한 데 이어 지난해 강만수, 이팔성, 어윤대 등 MB정부 시절 4대 천왕으로 불리던 금융지주 회장들이 금융당국의 압박에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나듯 퇴진했다.
은행 CEO의 불명예 퇴진사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관치 인사가 이뤄지다 보니, 정권 출범과 함께 화려하게 취임했다가 정권 말기 쓸쓸히 퇴진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지난달 신한, KB, 하나금융은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대거 교체하는 등 지배구조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한사태 여파 속에서도 한동우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고,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김정태 회장은 연임 임기를 3년으로 확대해 내년 연임할 경우 2018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들 3대 지주 회장은 이번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대거 교체해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일각에서는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한동우, 김정태, 임영록 회장이 장기집권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지금부터 CEO 승계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
CEO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발렌베리와 GE처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체계화된 교육과 평가를 통해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
과거에 그래듯이 자기 사람을 심어 놓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이나 전관예우(前官禮遇)를 받을 생각일랑 하지 말자. 금융당국, 주주, 고객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승계가 이뤄진다면 재임기간에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금융지주 회장은 금융권의 고질적 병폐인 관치인사를 막는 데 직(職)을 걸어야 한다. 외압에 굴복하는 순간 금융지주 회장의 임기는 늘어날 수 있어도 조직은 멍들게 된다.
임기를 시작할 때 품었던 마음으로 조직을 이끌고, 부끄러움 없이 떠날 준비를 한다면 우리 금융사에도 명예스러운 퇴진, 존경받는 금융인들이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