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런가? 굳이 황우석 박사의 영향이 아니라도 우리의 평균 수명은 80세를 훌쩍 넘고 있다. 일반적으로 퇴직시기가 40세를 전후해서 일어나므로 그 시점에 대안이 없는 한 창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영업 평균 업력은 불과 2.8년에 머물고 있다. 아무리 선심을 써도 20년을 넘기가 어렵다.
물론 사업은 계속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 개인으로 보면 정년 이후에 사업을 계속한다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잘 되더라도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무언가 다른 일을 찾아야만 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치열하고 디지털화한 경영환경을 나이든 사람이 이끌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인생을 3막으로 보고 있다. 1막은 도전의 시기로 40세 이전, 2막은 성취의 시기로 주로 사업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65세 이전 기간이며, 마지막 3막은 65세 이후로 사회공헌의 시기로 규정하고 싶다. 이러한 흐름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며 이를 위한 각자의 대비가 절대 필요하다.
그렇다면 <3막 인생>을 준비하는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윗그림을 그릴 수 있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보면 윗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위성사진과도 같다. 2차원적인 거리의 간격, 행로의 표시, 진로 등과 같은 변수(variable) 등은 가시권의 한계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각(角), 척도(尺度), 요철(凹凸), 천리안(千里眼) 등은 3차원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를 떠나서 보지 않는 한, 우리는 지구를 한눈에 볼 수 없듯이 공간적 사고(思考)가 없는 한, 불확실한 미래를 그릴 수가 없다. 지도를 보고 떠나는 여행과 무작정 떠나는 여행의 차이와도 비교된다. 자신의 윗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2막>에서 성공했음을 전제로 우리는 <3막>을 미리 그려볼 필요가 있다. 안정된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동안 사회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다시 갚아나가는 일”이다. 즉, 사회공헌 활동에 마지막 <3막>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공헌이 종교에서의 오지 선교활동이나 NGO에서의 자원봉사, 불우이웃 성금내기 등과 같은 생산 외적 활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회활동도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일이지만 <3막>기간이 너무나 길어서 우리는 그것만으로 자신의 여생을 안전하게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스스로 영리를 위한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그 자체가 사회공헌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시대의 <3막>에는 홀로서기가 필수요건이며 그렇다고 영리추구에만 열중하다 보면 노후가 추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
최소한 <1막>은 <2막>을 위한 준비기간이기 때문에 상호 연계 가능성이 있어야 하며, <3막>은 <2막>을 기반으로 한 사회공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2막>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일례로 경기대 대학원 엄길청 교수는 증권회사 취업->경제평론가 입지 확보->교수로 전직했다. 3단계가 일맥상통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명세는 없지만 내가 아는 어느 주부의 그림도 지금까지는 제대로 가고 있음을 본다. 두 자녀를 둔 류수진(35)씨는 NGO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사회복지사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복지기관에 취업했다.
그 다음 그림은 복지관 건립을 통해 사회공헌과 자아실현, 그리고 다소간의 이윤을 계획하고 있다. 이대로만 된다면 그녀는 아주 훌륭한 3막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부단한 열정과 목적하는 바에 대한 염원이 합해지면 꼭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인생의 <3막>. 딱히 갈 곳도 없고,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자녀들도 소원해 지고, 게다가 돈도 없다면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다. 여유롭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 당장 오늘부터라도 윗그림을 그려보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에 되지는 않지만 내 말에 동의한다면 최소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형석(leebangin@gmail.com)
비즈니스유엔 대표컨설턴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