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경영권에 또 한 번의 적신호가 켜졌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던 현정은 회장. 2003년 8월 고 정몽헌 회장이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자 당시 사람들은 '걱정 반 우려 반'의 느낌으로 현 회장을 바라봤다.
"기업경영에 아무 경험이 없는 주부가 암초를 만난 현대 그룹을 과연 잘 이끌고 나갈 수 있을까"
특히 취임하자 마자 시숙부인 정상영 KCC명예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고, 대북사업 비리로 인한 김윤규 부회장의 퇴출을 놓고 북한과 한 바탕 기싸움도 벌여야만 했다.
2년 전 숙부인 정상영 KCC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하면 숙부의 난을 일으키자 숙부와 경영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지난해는 대북사업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의 개인비리로 촉발된 가신(家臣)의 난을 겪으면서 북한의 백두산 및 개성관광은 물론, 금강산관광조차 전면 중단될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 회장은 소위 ‘숙부의 난’과 ‘가신의 난’을 모두 평정하며 주위의 우려를 일거에 불식시켰다. 두 차례의 난에선 '숙부와의 지분 경쟁에서 승리', '김윤규 부회장의 퇴출' 등 극약처방을 내리며 여장부로서 면면을 보여줬다.
특히 이번 현대중공업그룹의 현대상선 지분 매입에 대한 현회장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단호하다. 현대중공업측의 지분 매입 이후 현회장은 금강산을 방문한 일정 속에서도 뭔가 숙고를 하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근로자의 날 연휴를 보낸 직후 현회장은 즉각 공식적인 반격에 나섰다. 현대상선은 '아무도 넘보지 못한다'는 기세다.
이번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매집으로 촉발된 '시동생의 난'에서도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시동생인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에게 "현대상선 지분 10%를 되팔라"고 요구하며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
현정은 회장측의 요구에 대해 정몽준 회장측의 공식적인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재계는 숙부에 이어 '시동생 난' 겪게 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 회장의 향후 대응 강도에 따라 형수와 시동생은 말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되기 때문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낙점한' 며느리...현대상선과의 인연
현 회장이 두 차례의 난(亂)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사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했다.
현정은 회장의 친정과 외가 또한 시댁 못지 않게 유명한 기업가 집안이다. 증조부인 현기봉 씨는 광주농공은행과 한국 최초의 보험회사인 조선생명을 설립했고, 조부 현준호 씨는 호남은행 설립자다.
부친 현영원(현대상선 회장) 씨는 현대그룹과 사돈이 된 후 자신이 운영하던 신한해운을 현대상선에 흡수시켰다. 현 회장의 외조부 김용주씨는 전방그룹 창업주이며, 모친 김문희 여사는 용문중·고교를 거느린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전방 회장인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현 회장의 외삼촌이다.
현정은 회장은 경기여중·고 시절 이름난 수재로 알려졌다. 월반을 거듭한 덕분에 17세에 이화여대에 입학했고 사회학을 전공하고 졸업을 한 그 해 고 정몽헌 회장의 아내가 됐다.
현 회장은 재벌가의 며느리로 있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첫딸을 낳은 후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페어리 디킨슨 대학에서 <인간개발론>을 전공한다. 시어머니는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말렸지만, 시아버지 고 정주영 회장은 며느리의 소질을 간파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미국에서 새로운 공부를 해올 것을 원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현 회장의 됨됨이를 보고, 며느리로 직접 낙점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 회장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면, 당시 부친을 따라 선박 명명식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나게 됐고, 이후 시아버지께서 남편과의 만남을 요청했던 것으로 쓰여 있다.
이렇게 현정은 회장은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고 있었지만 남편의 사망 전까지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으로 당당히 불린다. 가정주부에서 미망인 경영자로 우뚝 선 것이다.
현 회장의 측근들은 현 회장에 대해 “얌전한 인상이라고 꼭두각시나 종이호랑이쯤으로 봤다면 큰 오산”이라고 입을 모을 정도다.
현 회장의 경영철학은 ‘순천자흥(順千子興)’.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원칙과 순리대로 하면 흥한다는 의미다. 시숙부의 난은 물론, 가신의 난도 이와같은 경영철학을 견지하며 해결해 냈다.
두 차례의 난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동생의 난도 그의 경영철학대로 순리대로 처리하여 경영권을 수호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