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가 저축을 하면 기업이 이를 빌려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이 순리.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된다? 게다가 돈을 빌린 가계가 너도나도 부동산을 사들인다?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 경제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곧 오게 될 혼란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문제이기도 했고 정치권의 낮은 담론 수준도 큰 부담이 되었다. 뭐든 진지하게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저 부동산 시장이 유동성 장세에 흔들리지 않도록 다잡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 금요일자 이투데이 1면에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기사가 실렸다. 기업과 가계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인용된 전문가의 말을 소개해 본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기보다는 은행에 저축을 해 자금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가계는 대출을 늘리며 자금의 수요자가 되고 있다. 역할이 바뀐 모습이다.”
늘 걱정하던 일이지만 다시 한번 오싹해졌다. 다시 머리를 때리는 질문, ‘이런 경제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투자가 뒷걸음치고 있다. 국내총생산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4.9%, 10년 전인 2003년의 30%에 비해 5%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중요한 것은 추세. 2008년의 1.5%, 2010년의 3.4% 반짝 증가를 제외하고는 계속 답보 상태이거나 마이너스 성장이다.
돈을 벌지 못해 그런 것도 아니다. 2012년 기준 기업 소득 전체 볼륨이 300조원 정도다. 100조원 넘어선 것이 2000년이니 십년 남짓 기간에 3배가 늘어난 셈이다. 그러고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벌고도 투자를 하지 않으니 돈이 쌓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명박 정부 5년은 더욱 그랬다. 2008년 16%이던 기업 저축률이 5년이 지난 지금은 20%, 무려 4%포인트나 늘어났다. 기업 저축액도 170조원에서 250조원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45개 대기업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내 유보금이 300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반면 가계는 계속 빌려 쓰는 형국이다. 가계 저축률은 3%대 초반. 한때 20%를 오르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내려앉아도 너무 내려앉았다. 가계부채도 매년 증가해 이제 1000조원대에 이르고 있다. 또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140% 정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미국의 135%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면 채무의 성격. 미국 가계가 부동산을 많이 샀다면 우리는 전세자금이나 학비 등 생활비를 위해 빌려 쓰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악성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문제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상황 자체만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질문 능력이다. 참여정부 시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투자부진의 이유를 ‘좌파정부의 반기업 정서 때문’이라 했다. 해결책은 당연히 ‘좌파정부’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4대강이나 챙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토목정부’가 문제라고 했다. 그뿐인가.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통령이 재벌들을 불러 밥을 먹거나 압박을 가하면 투자활성화가 되는 줄 알고 있다.
부적절한 질문에 부적절한 생각들, 그 속에 우리 경제가 죽어가고 있다. 제대로 된 고민들이 밀려나고 있다. 이번 국회만 해도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때려 투자나 배당을 강제했던 제도를 다시 살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글로벌 환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어떤 그림 속의 어느 조각인지도 잘 모르겠다.
좀더 크고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기술 변화와 소비시장 변화에 따른 투자위험의 증대, 후진적 금융체계, 불합리한 인력공급 체계와 노동시장의 낮은 유연성 등 기업의 고민을 우리 사회의 공적 가치 속에서 용해해 줄 수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특히 정치권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