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와는 필력이 다릅니다. 하지만 너절하지 않고, 있으나 마나 하지 않은 화가로 후대에 남고 싶습니다.”
‘물방울 화가’는 붓을 쥔 오른손이 떨릴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왼손으로 이를 고정한 채 아직도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84) 화백이 물방울 시리즈를 전시하는 ‘화업 50년’전을 연다.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25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다. 물방울을 처음 그린 1970년대부터 근작까지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던 총 40점을 전시한다.
김 화백이 물방울을 만난 것은 프랑스에 정착한 1972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 살았던 김 화백은 화장실이 없어 밖에서 물통을 만들어 놓고 세수를 하곤 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 옆에 뒤집어둔 캔버스 위에 물방울이 튀었는데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지니까 햇빛에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고 전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물방울은 50여년간 김 화백과 함께했다. 1980년대에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다. 1980년대 중반엔 동양적 정서를 살리고자 마대에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을 채워 넣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또박또박 쓰인 천자문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화면 전반에 흩어진 ‘회귀’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가 배경으로 한자를 쓰는 이유는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김 화백은 “초등학교 입학 전 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는데 신문지 위에 붓글씨를 쓰던 기억이 향수처럼 남아 있다”며 “어릴 때부터 익힌 글씨이기도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다 뜻이 있고 깊이가 있고 조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0여년을 물방울에 집중해 온 김창열 화백에게 물방울이란 무엇일까. 김 화백은 “물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무색무취한 게 아무런 뜻이 없지. 그냥 투명한 물방울일 뿐”이라고 무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이윽고 “내 욕심은 그런 물방울을 갖고 그림을 만드는 것이었고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어떤 때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영혼과 닿을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며 물방울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한편 김 화백은 지난 5월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제주도와 협약을 맺고 작품 200점을 기증했다. 자녀들에게 작품을 물려주려던 것을 미술관 건립을 위해 후대에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다 내어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