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임 수석은 ‘박근혜의 복심’, 즉‘박심(朴心)’을 정확히 읽어내는 최측근 인사다. 1984년 민정당 당직자로 정계에 입문한 이 수석은 박 대통령의 속마음과 철학 등을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인물 중 한명으로, 친박(친박근혜)계에서도 핵심 중 핵심으로 꼽힌다.
이 수석은 전남 곡성 출신으로 광주 살레시오고와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85년 전남도지사를 지낸 민정당 구용상 전 의원의 총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치계에 입문했다. 이후 16대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후보 측 대선기획단장을 맡아 당내 전략기획통으로 활약했다. 당료로 활동하다가 지난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지난 4·11 총선에는 여권의 불모지인 광주 서구을에 출사표를 던져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텃밭에서 39.7%라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해 당에선 호남 배려 차원에서 지난 6월 그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엔 호남몫 당 지명직 최고위원을 거쳐 대선 기간 박 대통령의 긴급 호출로 공보단장으로 투입됐다. 이 기간 동안 이 수석은 박 대통령에 대한 각종 의혹과 검증 공세에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대야공세를 주도하며 야권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수석은 박 대통령의 ‘입’ 생활만 10년째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 탄핵국면에서 박 대통령이 당 대표를 지낼 때 수석부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후보 대변인을 맡아 박 대통령의 정책을 언론과 국민에 알리는 최일선에 섰다. 대선 경선 패배 후 박 대통령이 당의 비주류로서 정치적 칩거를 했던 2008년∼2010년에도 전례가 없는 ‘대변인격(格)’이라는 직함을 갖고 박 대통령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다. 이명박 후보 측의 선대위 고위직 제의와 김문수 경기지사 측의 정무부지사 제의를 모두 고사하면서까지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 ‘박근혜의 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당시 혼자서 전 언론을 상대하다 보니 휴대전화 배터리를 12개씩 준비해놓고 사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선 이후엔 박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이끈 대표적인 공신으로 꼽히면서 비서실 정무팀장에 기용돼 새 정부의 ‘실세’로 부상했다. 이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되면서 당·청간의 소통을 주도하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는 평가다.
이남기 전 수석이 언론과의 접촉과 정무적 판단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은 탓에 누구보다도 박 당선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무 감각까지 겸비한 이 수석은 일찌감치 후임 홍보수석의 적임자로 물망에 올랐다.
◇ 약력
△1958년 전남 곡성 △살레시오고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 전략기획단 단장 △한나라당 정책기획팀 팀장 △한나라당 상근 부대변인 △제18대 국회의원 △국회 예결·문방·법사위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캠프 공보단장 △새누리당 최고위원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 정무팀장 △청와대 정무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