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그림이 있는 골프] 필드를 걷는 즐거움

입력 2013-05-3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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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삽화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태초에 발이 있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의 저서 ‘문화인류학’에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진화의 원동력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약 600만년으로 추정되는 직립보행의 역사가 바로 인류 진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도구 개발, 두뇌 발달, 언어 창조, 수명 연장 등의 동인을 직립보행에서 찾는다.

직립보행, 즉 걷기가 오늘의 인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이듯 사람의 걸음걸이는 개인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걷기의 역사’를 쓴 조지프 A. 아마토는 ‘걷기는 곧 말하기’라고 단정했다. 걷기는 자기 나름의 방언과 관용구를 지닌 언어이며 걷는 사람의 몸매와 눈빛, 얼굴 표정, 팔 다리의 움직임, 엉덩이 움직임, 옷차림 등은 그 사람의 지위와 신분, 현재 상태, 목적지 등 풍부한 정보를 노출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사막에 찍힌 발자국만 보고 발자국 주인공의 나이, 성별, 건강상태, 무기 소지 여부 등 수많은 정보를 알아낸다.

골프에서 걷기는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 11세기 전후 스코틀랜드 대서양 연안의 황량한 들판에서 양떼를 몰던 목동들이 심심풀이 삼아 돌멩이나 털뭉치를 토끼굴에 처넣는 게임을 즐기거나, 마을의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재미삼아 막대기로 돌멩이를 치며 걸었다는 골프 기원설은 걷기가 없는 골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18세기 프랑스의 대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갈파했듯 낭만적인 걷기는 철학과 시의 산실이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 시인들은 산책, 산보 혹은 도보여행, 탐험 등 다양한 형태의 걷기를 통해 사상을 심화시키고 시를 짓고 자연과학을 연구했다.

골프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형태의 낭만적 걷기다. 골프장 자체가 다양한 자연을 모아놓은 압축 공간이며 여기서 라운드를 즐기는 사람은 낭만적 걷기의 애호가들인 셈이다. 인공이 가미되긴 했지만 초원, 연못과 개울, 모래벙커, 바위와 절벽, 덤불과 수목이 어우러진 골프코스는 현대인들에겐 4~5시간 동안 다양한 자연환경을 경험하며 대화하고 사색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운동’인 골프를 한다는 것만큼 매혹적인 소일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지팡이 집을 힘만 있으면 골프를 하라’는 속담이 있는 것도 단조롭기 쉬운 보통 오솔길의 걷기와 차원이 다른 골프코스에서의 걷기가 안겨주는 혜택과 즐거움 때문이리라.

미국 PGA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예외 - 이를 테면 연장전을 벌일 경우, 또는 의사가 인정하는 장애가 있을 경우 - 를 제외하고는 선수가 카트를 타고 경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는 골프에서 걷기의 숭고한 철학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골프는 누가 뭐래도 걷기에 골프채를 더한 것 이상일 수 없다. 고가의 장비와 화려한 의상은 장식품일 뿐이다. 골프에서 걷는 즐거움을 박탈해버린다면 골프는 금방 인기 없는 스포츠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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