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우리 기업들은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라는 틀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다. 4월이 됐지만 재계는 올 투자 계획조차 대부분 내놓지 못했다. 현금성 자산이 넘쳐나는 기업도 있지만 자금을 투자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실은 맞지만 속내는 다르다. 내부적으로 세밀한 투자 계획은 이미 다 짜놨지만 발표는 꺼리고 있다는 게 정답이다.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탓이다.
경제민주화는 현 정부를 포함해 지난 대선후보 모두의 공약이었다. 순환출자를 규제하고 공정거래를 강화하며 금산을 철저하게 분리하겠다는 의지다. 여기에 재벌 총수의 사면권 제한까지 얹어가며 표심을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정부가 강조한 경제민주화의 잣대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기업에게 어떤 규제를 얼마만큼 내세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현 정부는 출범 전인 작년 11월 총수의 배임과 횡령 모두를 집행유예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힘줘 말했다. 하지만 최종 공약집을 발표하던 시점에서 ‘배임’은 조용히 빠졌다. 이 외에도 경제민주화 공약 가운데 재벌 견제 부분은 상당수 축소되거나 삭제됐다.
반면 이러한 흐름과는 정반대로, 최근 재계 총수들은 연이어 사정기관에 불려가거나 실형 구형이 이어지고 있다. 이쯤되면 기업은 잔뜩 주눅들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재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순환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등 13개 경제민주화 관련 제도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발하고 있다. 기업의 소유와 지배 사이의 괴리를 좁힌다고 기업 가치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이들의 골자다. 기업에 대한 생산적 비판이 아닌 정권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급급하다는 지적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법조계도 ‘법해석의 모순’을 들어 경영인에 대한 ‘배임’ 의미가 확대됐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눈치보던 기업은 더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갑자기 정책이나 정부 태도가 돌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가장 큰 공을 들였다는 정책이 경제민주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정책의 명확하고 뚜렷한 기준과 잣대가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의 전략까지 모호해졌다. 누가 책임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