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의 새 정부 코드 맞추기가 시작된 것일까.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비정규직을 늘리고 무기계약직은 줄여 빈축을 샀던 은행권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은행권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정년 연장 등에 적극 나서면서 타 업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약자에게 따뜻한 배려를 실천하고자 하는 은행권의 고용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규직·비정규직 어느 쪽도 아닌 ‘중규직’ 이라는 논란과 함께 눈치보기식 정규직 전환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기존 정규직과 비교해 직무와 급여체계가 별도로 구성되기 때문에 오히려 차별을 고착화시킨다는 지적이다.
IBK기업은행은 올해부터‘무기계약직 채용공고’를 내고 창구텔러, 사무지원, 전화상담원 등을 모집하고 있다. 이들 직군을 아예 무기계약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신한은행도 향후 채용하는 모든 창구텔러를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계획이다. KDB산업은행 역시 고용 형태를 정규직 채용으로 일원화하기로 했다.
앞서 은행들은 기존 일반 계약직 사원에 대한 정규직 전환 조치를 잇따라 실시했다. 기업은행은 창구텔러, 전화상담원, 비서 등 계약직 사원 총 1132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켰다.
신한은행도 현재 근무 중인 계약직 전담 텔러 695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지난해 12월 계약직 텔러로 채용돼 연수 중인 143명(고졸 85명 포함) 역시 모두 정규직으로 신규 발령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말 계약직 85명을 무기계약직으로 바꾼 데 이어 올해도 단계적으로 계약직을 무기계약직 또는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이미 계약직의 90% 가량이 무기계약직이다.
은행권의 이같은 고용 안정 조치는 직원들의 사기 진작 및 생산성 향상에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은행의 수익성이 악화됐고,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있는 만큼 고용 개선에 따른 부담은 어느 정도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 무기계약직 전환 갑론을박 = 그러나 무기계약직 전환이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이냐를 놓고서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은행들은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은 아니지만 정년을 보장받고 임금을 제외한 처우에서 동일한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무늬만 정규직일 뿐 처우는 계약직 수준으로 변한 게 없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정규직이라도 직군을 별도 구분해 임금과 승진·담당업무 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무기계약직은 정규직 월급의 70~80%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 내부적으로도 무기계약직과 정규직 사이에는 여전히 신분 차이가 발생하고, 승진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한 시중은행 인사부 관계자는 “전체 업무를 100으로 가정했을 때 정규직은 100을 맡을 수 있으나, 무기계약직은 60 정도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펀드나 방카슈랑스 업무가 제한된다거나, 수신업무 또는 일부 가계대출 취급만 할 수 있는 식이다.
일반 텔러가 일반 은행원 대리급 정도로 승진하려면 보통 1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여·수신을 비롯한 주요 업무들을 모두 해야 하는 일반직에 비해 창구 업무를 담당하는 텔러직은 업무 영역과 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백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구조라 현실과는 괴리감이 크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향후 무기계약직군들이 정규직 전환에 직면했을 때 은행 측에서 인건비 문제를 앞세워 정규직 전환에 소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지금까지 개별 은행들은 정확한 정규직 전환 비율을 밝히고 않았다. 금융당국에서 파악하고 있는 은행권 전체의 정규직 전환 비중은 매년 3~4%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주요 시중은행들의 비정규직 비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에 흡수되면서 표면상 정규직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내막을 들여다 보면 정규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이 늘어난 셈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정규직 전환시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 지난 2007년 우리은행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대규모 전환하면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규직 직원들의 급여를 동결한 사례는 이를 방증한다.
※용어설명
무기계약직 = 무기계약직이란 계약직과 정규직의 중간 개념이다.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기 때문에 고용 안정성 측면에서 정규직과 유사한 근로계약이지만 임금이나 복지 수준은 계약직 수준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