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어느날, 따가운 햇빛이 A군의 교련복과 군인들의 철모위로 떨어졌다. 국군의 날 행사를 위해 여의도에 모인 청춘들이었다. 짜증스럽고 힘든 제식훈련이었지만 사춘기를 전후한 젊음들이 모여 뿜어내는 소리가 맑고 유쾌하게 광장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속에서 A군은 초등학교 졸업후 4년 만에 처음으로 B양을 보았다. 그녀의 어깨 위로 번지는 햇빛이 A군에게는 아우라처럼 찬란하게 느껴졌다.
운명을 직감한 A군은 동창회장을 통해 B양을 찾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대신 또다른 친구인 C양이 앉아 있었다. 일주일 내내 자신을 꿈에서 만났다는 C양의 이야기에 A군은 자신의 운명이 C양인가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둘은 오랜 연애 끝에 아내와 남편으로 살게 되었다.
B는 그러나 마흔이 되도록 짝을 찾지 못했다. 그사이 부모님도 떠나고 그녀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친구 C가 외로움을 달래주곤 했지만 세월은 점점 친구를 먼 곳으로 데려만 갔다.
친정어머니 병간호로 경황이 없던 C에게 서너 번 메아리 없는 눈물을 흘렸던 B는 스스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외로움 없는 곳을 찾아서.
B양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A군의 '운명'이 맞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일 주일 내내 꿈에 나타난 A가 C의 '운명'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과연 사람의 인연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자신이 친구의 인연(因緣)을 가로챘다는 죄책감에 9월이 되면 한 번씩 가슴앓이를 하는 C를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