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노후를 대비하는 것이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좋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달콤함을 포기하는 사람이 적어 문제가 됐다. 그렇다고 정부가 개인의 의사에 반해 저축을 강제할 수도 없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자유시장의 원칙에 맞게 개인의 퇴직연금 가입률을 높일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국회가 택한 것은 행동경제학의 도움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경제학을 더 현실 세계와 가깝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다니엘 커너먼(Daniel Kahneman)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심리학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학문적 성취 역시 인정받았다.
커너먼 교수는 인간을 합리적 경제주체로 보는 기존 경제학의 근본 가정을 뒤엎었다.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돼 있다고 본 커너먼은 경제인(Homo Economicus) 대신 ‘사람(Homo sapiens)’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따라 개정안은 우선 기본값(Default Option)을 퇴직금 대신 퇴직연금으로 바꿨다. 지금은 개인형퇴직계좌(IRA)를 지정하지 않은 퇴직자의 경우 퇴직소득세를 공제하고 남은 돈을 모두 현금으로 받고 있다. 6개월 이내에 IRA를 개설해 여기에 퇴직금의 80% 이상을 적립하면 퇴직소득세를 돌려준다는 ‘미끼’를 남겼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을 위해 일단 손에 쥔 돈을 내놓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제 개정안이 시행되면 돈을 만져볼 기회가 원천 박탈됨으로써 퇴직연금 적립률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넛지(Nudge)’로 유명한 행동경제학자 리차드 탈러(Richard Thaler) 교수는 “사람은 멀리 있는 큰 이익보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선호한다”며 퇴직연금 기본값 몇 가지를 바꾸는 것만으로 근로자 절반의 평균 저축금액이 소득의 3.5%에서 2년 뒤 11.5%로 늘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같은 원리는 소득공제 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직장인들은 ‘13번째 월급’이라며 연말정산을 반기지만, 사실 이는 이미 낸 세금을 돌려받는 것이므로 공돈이 아니다. 세금공제율을 조정해 세율과 환급 규모를 모두 줄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지만 우리는 ‘보너스’를 받는 듯한 기쁨에 현행 제도를 문제삼지 않는다. 만약 소득공제가 ‘정부가 무이자로 우리의 돈을 1년간 쓰고 원금을 돌려주는 제도’로 홍보됐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이 역시 ‘넛지’에 등장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경제학적 성찰이다.
인문학적 사고는 사회적 정책결정뿐 아니라 개인의 재테크에도 꽤 유용한 충고를 준다. 혹 스스로 금융치(痴)라고 생각한다면,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전에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를 떠올리길 바란다. 다원적 무지는 사회적 동물(homo sociologicus)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개념이다. 사회심리학자 플로이드 올포트(Floyd Allport)는 타인의 의견에 휩쓸리면서도 그 의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될까 두려워 존재하지 않는 옷을 보이는 척 했던 동화 속 어른들처럼, 현실에서의 우리도 금융에 대한 무지를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의 말에 의존하게 된다. 전문가 역시 다원적 무지에서 자유롭지 못해, 관행적 조언을 계속하는 경우 우리는 수많은 비합리적 결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숫한 처지의 동료와 상의하는 것은 어떨까? 제임스 스토너(James Stoner)는 집단이 논의를 계속할수록 집단의 의견은 토의하기 전의 반응 평균과 같은 쪽으로 더 극단화된다는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를 주의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스토너에 따르면 자산을 어디에 투자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집단은 점점 위험한 쪽으로 결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집단의사결정에서 더 안전하고 보수적인 대안이 나올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더욱 모험적인 대안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모험적 이행(Risky Shift)이라고 명명했다. 결국 친구와 상담한 투자자는 안정적이지만 기대수익률이 낮은 투자처보다는 기대수익률과 원금 손실 가능성이 모두 높은 쪽을 고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