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 같은 질문에 푸근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이 딱 ‘커피CF’의 한 장면이다.
안성기는 “(연기 잘한다는 칭찬이) 오래된 경력에 비해 내가 제 역할을 못해왔단 소리 아닌가”라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이내 “아마 감동 받았다는 표현을 ‘좋았다’로 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면서 “55년 만에 제대로 된 배역을 만난 것 같다는 좋은 의미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시나리오가 기존 대비 다른 영화보다 상당히 얇았다. 그만큼 내용 구성이 치밀했다”면서 “오랜만에 정지영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주셔서 편하게 읽었는데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부러진 화살’은 당초 고발 다큐 형태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안성기의 갑작스런 출연 결정에 급하게 상업적 형태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후 이경영, 문성근, 박원상 등의 배우 출연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모두 안성기의 힘을 믿었다. 하지만 정작 안성기는 모든 공을 13년만에 현장으로 복귀한 정 감독과 후배들에게 오롯이 돌렸다.
안성기는 “정 감독님과는 1992년 ‘하얀전쟁’ 이후 처음이다. 당시에도 엄청난 내공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 져 있더라. 역시 범접할 수 없는 고수였다”고 말했다. 또한 “문성근과 이경영 등 다른 후배들도 이 영화에서 모두 맡은 역 이상의 힘을 보여줬다. 난 그저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연기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 했다.
하지만 단순히 겸손만은 아니다. 사실이면서 너무도 영화적인 이번 영화에 안성기는 설득력이란 무기를 쥐어주었다. 그가 연기한 ‘김경호 교수’는 도저히 납득키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데도 시사회 뒤 쏟아지는 반응은 ‘공분’ 이상이었다.
그렇게 표현된 영화 속 김경호 교수는 일반적 개념에선 도저히 납득키 어려운 인물이었다. 자신의 변호인을 법정에서 해고하고, 판사에게 독설을 던지는 등 아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됐다. 혹시 실제 김 교수를 만난 뒤 이끌어 낸 모습일까.
안성기는 “일부러 김 교수를 만나지 않았다.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었다”면서 “시나리오에서 이해한 교수님은 주변 사항을 고려안하고 그냥 앞만 보고 나가시는 분이었다.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절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런 분 말이다”고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아직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기회가 되면 김 교수와 함께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그는 “난 천상 배우인 사람”이라며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말하지만 난 그쪽이 싫다. 평생을 영화배우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배우로 살아갈 사람이다. 하고픈 말은 영화로만 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영화 하나 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이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데뷔 55년차의 배우 안성기.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넘어 연출에 대한 욕심도 드러낼 법했다.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작업한 감독만 수십 명에 이른다. ‘보고 있으면 욕심이 날 법도 한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안성기는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출을 욕심내지 않는가”라면서도 “하지만 영화를 찍을수록 (연출에)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단 생각이 커지고 있다. 솔직히 잘 만들 자신도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