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80년대 캠퍼스에서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겪으면서 성숙해졌던 일원으로서, 한국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집은 산업화와 민주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더욱이 글로벌 IT 산업 태동기에 제3의 물결을 타고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상장 회사를 경영하기까지 우리 사회가 제공한 기회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다이나믹한 코리아’를 생각하면 항상 일이 즐겁다. 일할 생각에 새벽 동트기를 기다린다는 고 정주영회장 같은 분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한 게 아닐까 싶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할아버지 세대와 6.25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아버지 세대의 고통과 설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어찌 국가와 시대가 우리에게 준 행운이 아니겠는가? 1960년대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회”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에 서구 문명을 수용하면서 영어 “society”를 번역한 말이고, 그 어원인 라틴어의 “socius”는 “동반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통사회에서 중요했던 혈연과 지연이라는 기반이 무의미해진 ‘사이버’ 공간이 ‘쇼셜 네트워크’형태로도 발전하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대안과 공적인 발언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사회에서 기업은 이윤창출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가치관을 가진 주주와 경영자, 사원들의 공동체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의 한 형태인 국가도 주권을 가진 국민, 대통령, 공무원들도 국가구성원으로서 공동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난 개발연대에 전 세계가 놀랄만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지만 이제는 선진민주국가로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 1997년 IMF 경제위기와 극복, 2008년 금융위기와 극복을 경험하면서 경제적 고도성장 이면에는 어둠이 존재한다.
양극화 시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마찰이 점증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초고속 압축 성장의 비용을 지불해달라는 청구서를 받아든 셈이다.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중국 도처에서 벌어지는 농민공의 생존권 투쟁을 보면서 빠른 경제성장은 반드시 사회의 어둔 곳에 소외된 희생자를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는 시대적 키워드는 빈부격차 양극화, 청년실업, 고령화 사회진입, 고물가, 고환율, 부동산침체, 가계부채, 노사갈등, 정부와 기업의 마찰,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갑과 을의 관계,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복지 요구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동반성장 이라는 화두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민간기구인 동반성장위원회를 통해 산적한 국가적 문제를 과연 해결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이제 우리는 지속가능한 안정 성장과 질 좋은 성장을 고민해야 한다. 동반자관계를 통해서 서로가 상생하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해야만 지속가능한 안정성장이 가능하다는 국민적 컨센서스를 마련해야 한다.
반값 등록금, 반값 아파트, 무상복지와 같은 정치적 슬로건에 휘둘리지 말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 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