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세 자녀인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씨가 지난해 말 인사에서 삼성전자 사장, 호텔신라·에버랜드 사장,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으로 각각 승진하면서 본격적인 3세 경영시대를 예고했다.
재계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변화와 향후 계열분리가 어떻게 될 것인 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증권가와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계열분리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에서도 이 문제를 심도 깊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의 순환출자구조다.
이재용 사장 등 3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는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에버랜드 등의 지분을 효과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률과 비용 문제도 삼성의 과제다.
◇ 3세경영, 승진 외에도 지분정리 필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세 자녀가 각각 승진하면서 이들의 경영보폭은 눈에 띄게 확대될 전망이다.
이건희 회장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경영권 승계가 당장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계열분리를 포함한 경영권 승계작업에 가속도가 붙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여부에 따라 삼성은 다양한 경우의 수를 놓고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
이은정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당장 지주회사로 전환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지분을 상속하고 세 자녀에게 계열사를 분할해 상속하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편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20.76%), 삼성에버랜드(3.72%), 삼성전자(3.38%), 삼성물산(1.37%) 등 그룹 주요 계열사의 지분정리 향방이 향후 계열분리의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보유 지분을 어떻게 자식들에게 상속·증여하느냐가 계열분리와 지배구조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에 따라 삼성카드가 보유 주인 삼성에버랜드 주식 (25.64%)의 5% 초과분을 오는 2012년 4월까지 어떻게 처리하느냐도 3세경영 시대를 위해 삼성그룹이 풀어야 할 과제다.
증권가와 재계는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계열분리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의 계열분리는 이재용=전자· 금융, 이부진=호텔·레저·건설, 이서현=패션·정보전자소재로 나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도 자녀들에게 전자, 유통, 제지 등으로 계열분리를 통한 상속을 함으로써 지금의 신세계, CJ, 한솔 등이 범 삼성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성그룹이 계열분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3세들 간의 지분을 정리해야 한다.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인 에버랜드 지분 25.1%를 보유했을 뿐 그룹 주력계열사인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의 보유지분율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도 각각 에버랜드 주식 8.37% 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장 계열사 주식은 전무하다.
이부진 사장이 에버랜드를 포함한 레저계열사를 이끌기 위해서는 이재용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에버랜드 지분을 인수해야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경우 삼성카드가 보유중인 에버랜드 지분을 이부진 사장이 사들이고, 이재용 사장이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과 이부진 사장의 삼성 SDS 지분을 맞교환하는 방안도 유력히 거론된다.
이재용·이부진 남매가 에버랜드, 삼성SDS 주식을 맞교환 할 경우 각각 레저계열과 전자계열사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시나리오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에버랜드가 이부진 사장에게 돌아간다면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은 어떤 식으로든 이부진 사장 또는 특수관계인에게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부진-에버랜드, 이재용-삼성SDS’ 구조가 완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계열분리 수순을 밟게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이재용 사장은 삼성SDS를 발판으로 전자 계열사와 금융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건희 회장, ‘위기강조→투자→위기강조→투자’
삼성그룹은 올해 43조10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키로 결정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현재 수준에 머무르면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하며 위기를 극복할 방법으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지난해 3월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위기’를 강조한 뒤에는 언제나 과감한 투자결정이 뒤따랐다.
이 회장은 삼성 사장단이 경영복귀를 요청하는 자리에서 “지금이 진짜 위기다.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도 3~4년 후에는 사라질 수 있으니 앞만 보고 가라”라며 위기의식을 고취시켰다.
삼성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갖기를 당부함과 동시에 이 회장은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 5개 사업을 미래성장동력으로 육성키로 했다.
이 회장은 당시 회의에서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히 투자해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며 “환경 보전과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향후 10년간 5대 신수종 사업에 23조원을 투자해 매출 50조원대의 사업으로 키울 계획이다.
이 회장의 ‘위기 의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수장인 김순택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사장단 회의 모두발언에서 “이 회장이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다가 올 변화를 직시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은 지난 3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2011 삼성 신년 하례식’에서도 기자들과 만나 삼성의 위기의식을 다시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매출·영업이익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후인 9일 이건희 회장의 칠순만찬에서도 삼성을 넘어 한국의 위기의식을 역설했다.
이 회장은 후발주자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사업분야의 리더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대규모 투자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새로운 10년 동안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주력사업의 지배력 강화와 미래사업의 조기 정착을 동시에 꾀하겠다는 뜻이다.
삼성 내부에서는 오너의 복귀가 대규모 투자를 이끌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실제로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은 “CEO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며 “그룹 전체의 미래를 위해 대규모 투자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오너 몫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이같은 대규모 투자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을 비롯한 2세들이 경영을 할 시기에 안정적인 사업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내재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재계 관계자는 “3세들의 경영보폭이 넓어졌지만 아직은 삼성그룹에서 이 회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며 “그룹의 미래와 함께 자식들에게 안정적인 사업구조 구축을 동시에 꾀하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