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 바로 ‘이목지신(移木之信)’이다. 모든 일에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신뢰’보다는 ‘신뢰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핵심이다.
정부의 사정칼날이 무섭게 돌아가고 있다. 국세청과 검찰을 동원해 진행되고 있는 사정의 칼은 태광, C&그룹 등 중견기업에서 시작해 재계서열 3위 그룹인 SK그룹에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 16일부터 SK그룹 지주회사인 (주)SK를 시작으로 핵심계열사인 SK텔레콤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SK그룹 세무조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재계에서 그 동안 떠돌던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G20 비즈니스 서밋과 정상회의가 끝나면 대기업 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태광이나 C&그룹 조사는 전초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SK그룹이 재계에 떠돌던 사정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재계에서는 L, S, H 등이 MB정부의 눈 밖에 나 사정대상에 포함됐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L그룹은 최근 주력 계열사 몇 곳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고 이니셜 H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한 그룹도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 사정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분위기가 있다. 당하는 기업은 하나같이 강하게 반발을 하거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칼을 휘두르는 쪽만 신이 난 형국이다.
국민들도 이번 사정에 대해 더 강한 조사를 촉구한다거나 기업을 비난하거나 하는 여론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또 예전 같으면 정말 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떠들어 대던 언론들도 난리법석을 떨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 대상이 된 기업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은 듯하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와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이번 정부는 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면서 집권초기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책을 통해 친기업 이미지를 심었다.
이런 이유로 기업들은 정부가 벌이는 모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부 초기 17개 신성장 동력 육성정책이 발표되자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저마다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로 화답했다.
또 지방선거 패배이후 ‘친서민’이 새로운 정책 기조로 자리잡자 기업들은 미소금융, 햇살론 등 서민금융에 대규모 자금을 출연했다. 또 ‘상생’이 화두가 되면서는 납품단가 인하, 거래절차 개선은 물론 상생펀드 조성 등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다.
재계가 이번 사정정국을 서운하게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정부의 정책이 바뀔 때마다 군말 없이 협조한 결과가 결국 사정의 칼날인가’ ‘도대체 과거 정부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신뢰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집권 말기 레임덕을 감안하면 이번 정부의 임기는 이제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 어떤 정책의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어떤 정책도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상앙’의 시대 이전의 진나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