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엔 가치 하락 때마다 비판했으나 이번에는 침묵
엔저로 수입 비용 부담 감소...미 인플레 억제 효과
일본, 수출 대기업 경쟁력 제고에 엔저 용인
미국 달러화와 함께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꼽혔던 일본 엔화 가치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엔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미국과 일본 정부 모두 이번에는 이를 용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고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달 28일 6년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달러·엔 환율이 장중 125엔을 넘긴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달러·엔 환율은 110엔대 안팎에서 거래됐다.
엔화 급락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미국과 일본 중앙은행의 상반된 금융정책이 꼽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지난달 기준금리를 올린 데 이어 보다 공격적인 긴축 행보를 예고한 상태다.
반면 일본은행(BOJ)은 지난달 29~31일 10년 만기 국채를 연 0.25%의 금리에 무제한 매입하는 공개시장 조작을 진행했다. 금리가 0.25%를 웃도는 거래는 수요 자체를 말려 장기금리를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0.25% 이하로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상반된 금융정책에 따라 미국 10년 만기 채권 금리는 2.5%에 달하지만 일본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0.25% 수준으로 금리 차이가 10배에 달한다.
이 같은 이례적인 ‘엔저(低) 현상’에도 일본이나 미국 모두 태연한 모습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지난달 25일 "엔화 약세가 경제와 물가에 '플러스'가 되는 기본 구조는 변함이 없다 "고 거듭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BOJ가 자국 수출 대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이례적인 엔저를 용인하는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제조업체들이 엔화 약세 혜택을 받아 가격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 금융정책 담당자들은 대체로 달러·엔 환율 하락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WSJ는 설명했다. 앞서 BOJ는 올해 1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엔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약 1%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과 달리 일본의 물가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미국의 금리 인상에 발맞춰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도 BOJ가 이례적 엔저 현상을 용인하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엔화 가치가 급락할 때마다 으름장을 놓았던 미국도 이번만큼은 묵인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때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포함해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하락하고, 달러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갈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율이 8%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엔화 가치 하락이 상대적으로 수입 비용을 낮추고 인플레이션 억제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판단에 기록적인 엔화 가치 하락을 묵인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가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 행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인플레이션이다.
하지만 엔저 현상에 대한 일본 내 우려는 커지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석유·가스 수입 비용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곧 서민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수출 대기업과 해외자산을 보유한 부유층만 엔화 약세의 혜택을 받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