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 화재로 EUV 장비 수급 어려움 커질 듯…삼성전자 등 예의주시
단기적 메모리 반도체 가격 긍정적…산업 불확실성 증대 우려도
새해부터 반도체 업계를 둘러싼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 산업을 강타했던 공급망 불안정성이 올해도 지속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중국 시안에 있는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1·2 공장은 지난달 29일(이하 현지시간)부터 보름가량 생산량을 줄이며 공장 운영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시안시 당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과 생필품 목적의 차량을 제외한 기업과 시민들의 이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봉쇄 조처를 내리며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생산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측은 중국 당국과 원활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래 수준의 생산 재개 일자나 구체적 계획을 확정 짓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현지 근무 인력 부족 현상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안에 D램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둔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도 현지 근무 인력 감소로 인해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첨단 반도체 장비인 EUV(극자외선)를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업체 ASML 베를린 공장에선 이달 3일 화재가 발생했다. EUV 장비에 필수적인 ‘웨이퍼 클램프 모듈’을 만드는 60평 규모의 공간이 손상을 입었다. ASML은 9일 독일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EUV 장비 생산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고객사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했다.
차량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는 중국 파운드리 업체 화홍반도체 3공장 발전소에도 이달 7일 불이 나 3시간가량 생산 설비가 멈춰섰다.
경영상 어려움 이외의 이 같은 사고가 반도체 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복합적이다.
우선 단기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수급에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D램과 낸드 시장 주요 플레이어의 생산량이 동시에 줄어들며 가격 하락을 방어할 여지가 생겼다. 삼성전자의 시안 낸드 1ㆍ2공장의 물량을 모두 합하면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에 달한다. 전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으로 범위를 넓혀도 생산 제품의 비중이 15.3%에 이른다. 마이크론의 후공정 공장은 전체 생산량에서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현물 가격 등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복수의 시장조사업체는 D램과 낸드 가격이 1분기 저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했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1분기 D램 평균 판매 가격이 지난해 4분기에 비해 8~13% 하락하고, 낸드플래시 역시 전 분기 대비 평균 10~15% 이상 가격이 내릴 것으로 봤다.
이원식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 정부의 시안 지역 봉쇄 조치가 장기화하며 D램과 낸드 모두 공급 차질이 발생한 가운데 세트 생산 개선으로 PC, 서버 세트업체들의 메모리 재고는 감소해 수요 전망치가 상향 조정됐다"며 "상반기 메모리 가격 전망에 대한 눈높이가 상향 조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관련 기업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가격 방어가 되는 면이 분명 있다"면서도 "기업으로선 공급이 줄어든다고 해서 일정 수요가 유지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EUV 장비의 생산 차질에 대해선 업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 TSMC, 인텔, SK하이닉스까지 첨단 반도체 설비를 운영하는 기업들이 앞다퉈 EUV 수급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ASML의 연간 EUV 장비 생산량은 30~40대 수준에 불과하다. 이번 화재로 인해 EUV 장비 반입이 늦어지면 첨단 반도체 공정에서 비용 절감과 생산속도 개선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당장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2025년까지 EUV 장비 100대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SK하이닉스도 차세대 D램 제품 생산을 위해 이천 신규 공장인 M16에 EUV 장비를 들여놓고 있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EUV 노광 장비를 이용하는 D램과 5㎚(나노미터) 이하 로직 반도체 생산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생산 차질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면 실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미국 오스틴 시에 있는 파운드리 공장이 한파로 인해 멈춰 서면서 삼성전자는 약 4000억 원 규모의 손해를 봤다. 오스틴 공장의 경우 완전히 가동이 멈췄던 반면 시안공장은 가동률을 조정하며 운영을 지속하고 있어서 손실 규모는 지난번보다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이달 말 삼성전자 연간 실적발표에서 시안 봉쇄에 따른 손실 규모가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전반적인 밸류체인 안정성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앞서 지난해 초 차량용 반도체 업체인 NXP와 인피니언, 르네사스가 한파와 화재 등으로 인해 가동을 멈추며 촉발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상황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