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비자들의 명품 사랑이 유별나긴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해외여행 길이 막히고 억눌린 보복 소비까지 더해지면서 명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해 국내 명품시장 규모는 약 15조 원으로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전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의 한껏 높은 콧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이들의 ‘우월적 지위’를 새삼 실감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 아침이면 서울시내 대형 백화점 앞에 늘어서는 긴 대기줄이 일상이 됐다. 10시 30분 개점하는 백화점 앞엔 새벽부터 줄 서기가 시작된다. 글로벌 3대 브랜드인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에루샤)을 비롯한 일부 브랜드의 ‘오픈런’(백화점이 문 열자마자 매장으로 질주) 현상 때문이다. 대기 번호를 받아야 매장에 입장할 수 있는 이들 브랜드는 돈이 있어도 원하는 물건을 맘껏 살 수 없는 '한정판' 소비심리를 제대로 자극하고 있다.
루이비통은 최근 한국 시내면세점에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국내 면세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한국 면세점에서 중국 보따리상(다이궁)들이 구매한 제품이 중국에서 불법 유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데, 이 역시 희소성을 더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는 고급화 전략으로 보인다. 면세점 업계는 루이비통을 대체할 만한 브랜드도 없는 데다 에르메스, 샤넬까지 철수할까 걱정하며 협상을 통해 철수를 최대한 막겠다는 방침이지만 결정권은 루이비통이 쥐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글로벌 명품을 대체할 만한 K럭셔리 브랜드의 부재다. 국내 경제 규모가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고 한류가 발전하면서 K팝·K드라마·K뷰티 등 ‘K브랜드’가 선전하고 있지만 ‘K명품’ 브랜드는 아직까지 존재감이 미미하다. 지난 10여 년간 전 세계에서 소프트파워를 키워온 한류는 최근 몇 년 사이 방탄소년단(BTS)의 음악과 ‘기생충’, ‘미나리’ 등 영화에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고,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 LG생활건강의 ‘후’를 필두로 한 K뷰티에까지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유독 패션으로 대표되는 ‘K명품’만은 높은 진입장벽을 절감하고 있다.
세계적인 패션 잡지 ‘보그’의 수지 멘키스 에디터는 몇 년 전 방한해 “한국은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아직 마케팅 실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명품 브랜드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품 브랜드가 되려면 최고 수준의 품질은 기본이고, 그 위에 오랜 전통, 고유의 스토리, 브랜드 철학을 담아 구매자의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 한국이 전 세계 제조업 시장에서 K반도체와 K배터리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만큼, 이제 럭셔리 명품 시장에서도 새로운 유행 트렌드를 앞장서서 주도해가는 퍼스트무버가 돼야 할 시점이 무르익었다.
K명품 개발에 뛰어드는 시도도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올 3월 내놓은 폴 뽀아레의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 ‘뽀아레(POIRET)’는 세계 시장에서 명품과 어깨를 겨뤄보겠다는 의지로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폴 뽀아레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샤넬과 경쟁관계였던 프랑스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패션하우스 브랜드다. 샤넬이 고급의상에 단순함과 실용성을 부여해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준 디자이너라면, 뽀아레는 코르셋의 압박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디자이너다. 신세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전통과 스토리를 지닌 브랜드의 상표권을 인수했다. 국내에서 판매를 시작했으며 앞으로 유럽, 미국, 중국 등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다.
프랑스가 오랜 세월 문화강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부터 문화부 예산을 꾸준히 늘리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없애 미술, 음악, 문학 등은 물론 대중음악, 패션, 만화, 요리, 서커스에까지 정부 지원을 확대하는 문화민주주의 정책을 펼친 덕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와 제품이 주목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정부와 관련 기업들이 K명품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 ‘K브랜드 강국’을 완성하는 ‘마지막 눈동자’를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hy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