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대책회의’ 이후 유수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 계획이 빠른 속도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사상 최대 시설 투자 계획을 밝힌 대만 TSMC와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는 인텔은 일찍이 증설안을 확정하고 착공 준비에 여념이 없다. 삼성전자 역시 세 유력 후보지를 두고 증설안을 구체화하고 있지만, 하반기부터 시작될 글로벌 반도체 증설 랠리 타이밍에 발을 맞추기 위해선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2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TSMC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애리조나 공장에 들어갈 장비 주문과 가격 협상을 올 7월까지 마무리하고, 하반기 착공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총투자비는 360억 달러로, 월 10만 장 규모의 반도체 웨이퍼를 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이달 중순부터 애리조나공장에 파견할 인력 1000명도 선발 중이다.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기존 연봉 2배, 주택과 차량 제공 등 과감한 조건을 건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경우 텍사스 오스틴과 애리조나, 뉴욕 세 후보지를 두고 증설안에 대한 고심을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선 이르면 내달 투자 계획을 확정해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안보'를 재차 강조하며 현지 증설투자에 대한 압박이 강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여전히 가장 유력한 선택지는 텍사스주다. 2018년부터 증설을 대비해 100만 평이 넘는 신축 시설용 부지를 확보한 데다, 기존 공장이 갖고 있는 원자재와 부품 수급 체계를 활용하기도 유리하다.
다만 막판 뒤집기 가능성을 두고 나머지 후보지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주 무기’는 세금 감면 등 인센티브 혜택이다. 삼성전자와 텍사스주가 올해 초부터 인센티브 규모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음에도, 격차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 상황을 의식한 선택이다.
뉴욕주는 역사상 최대 규모인 9억 달러(약 1조 원) 규모 인센티브를 내걸었고, 애리조나주는 양질의 일자리 1개 창출 당 3년간 최대 9000달러의 세금 공제를 주겠다며 맞섰다. 현재 경매 절차를 진행 중인 애리조나주 2개 부지(굿이어, 퀸크릭)에 대한 정부 문서에선 삼성전자 증설 후보지임을 암시하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인텔 역시 애리조나에 22조 원 규모 파운드리 증설을 준비 중이다. 인텔은 백악관 회의 이후 차량용 반도체를 6~9개월 안에 만들겠다고 화답하는 등 미국 정부의 반도체 패권경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어, 이른 시일 내에 착공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하면, 과도적으로 반도체 산업에선 이익을 보는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 현지화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산업에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체들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삼성전자의 신속한 경영 결정이 중요한 시점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재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재용 부회장 사면론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를 놓친 기업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라며 "경영 참여가 가능할 수 있게 (이 부회장) 형 집행정지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