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졌다고는 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숨이 차는 느낌도 들었다. H네는 온 가족이 우리 병원 단골이다. 25년이 넘었다. H가 결혼하여 아이까지 우리 병원엘 오니 3대가 다니는 셈이다. 4개월 전에 H아빠가 몸살 기운이 있다며 왔다. 목이 아프고 한기가 돌고 머리가 찌뿌듯하단다. 진찰상 특별한 소견이 없어 몸살에 준해 약 처방을 했는데 약을 먹어도 좋아지는 걸 모르겠다며 몇 번을 다시 왔다. 링거 처치를 해도 마찬가지다. 한 달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아 별 기대는 안 하고 검사나 한번 해보자며 한 건데, 백혈병이었다. H아빠는 “백혈병요? 그럴 리가요?” 했다. 바로 큰 병원으로 가라 해도 회사에 복귀해서 급한 일부터 마무리하겠단다. 그럴 정도는 아닐 거라는, 잘못된 검사라는 표정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환자가 오면 누가 더 젊어 보일까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 애매하다 싶으면 간호사들에게 물어봐 내가 더 젊어 보인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근데 H아빠는 나보다 젊어 보이는 몇 안 되는 환자 중의 한 명이다. 고혈압 당뇨도 없고 체중도 적당하고 담배는 안 피우고 술도 잘 못 마신다. 어린 H와 동생을 데리고 진료를 받으러 다닐 때부터 웃기도 잘하고 다감해 참 성실한 아빠구나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백혈병이라니?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믿지 않으려는 것도 이해는 됐다. H도 H동생도 H엄마도 진짜 백혈병이냐고, 요새 회사의 노조 일을 맡아서 골치가 좀 아픈 거 말고는 건강관리를 엄청 잘하는 아빠에게 왜 그런 병이 오냐며 이해가 안 된다고 따지듯 물었다. 그냥 운이 없어서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대답했는데, 대학병원에 가서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억지로라도 많이 먹고, 체력을 길러 병을 이겨내고 꼭 다시 만나자며 반가운 전화를 끝냈다.
유인철 안산유소아청소년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