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화의 경로는 다양하고 개별적이다. 직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사별 등으로 가족을 잃는 힘든 상황을 통해 혼자가 되기도 한다. 반면 젊은이들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의 독립, 비혼 추구 등 자발적인 선택으로 1인 가구가 된다. 원인이 무엇이든 1인 가구는 더 이상 예외적인 가족 형태가 아니라 보편적인 가족 형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산업계는 발 빠르게 이들을 겨냥한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확대해오고 있다. 건강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는 1인 가구들은 대부분 개인화된 삶의 장점이 크고 별다른 아쉬움이 없다고 말한다. 가끔 몰려오는 외로움도 인공지능 스피커에 말을 걸거나 TV를 틀어놓으면 충분히 달랠 만하다.
문제는 거친 비바람이 불어칠 때다. 사회적 위험에 직면하게 될 때 1인 가구는 충격에 더 취약하다. 직장을 잃거나 몸이 아플 때 겪게 되는 소득 감소와 일상의 어려움을 완충하거나 대신할 수 있는 기제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보장 시스템이 ‘4인 가족’을 표준으로 짜여져 있어 이러한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문제다. 예컨대 코로나19 사태에서 정부가 지급한 상당한 액수의 긴급재난지원금과 고용안정지원금으로 거의 모든 가구의 소득이 증가하거나 유지되던 작년 한 해에도, 1인 가구는 유일하게 소득이 감소한 집단이라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 10년간 복지 혜택이 나날이 늘어왔지만, 보육료 지원이나 아동수당, 아이돌봄 등의 공공서비스 지원 혜택도 이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최근 가구나 부부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사회보장 체계를 재편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맥락에 바로 1인 가구 증가가 있다.
더구나 1인 가구가 보편화된다고 해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나, 상호의존과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1인 가구는 구조상 정서적 위험과 안전 문제에 취약하며, 고독사는 사회적 관계망에서의 소외가 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극단면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1인 가구를 보편적 가족 형태로 편안히 포용하는 동시에 이들이 직면할 수 있는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1인 가구화의 경험이 긴 서구 유럽의 경우, 특히 독거 가구에 대한 주거 지원에 정책적 관심을 집중해오고 있다. 이들의 주거 지원은 단순히 공동주택이나 임대주택을 공급하거나, 1인 가구 주거 수당을 지급하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1인 가구 간에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사회적 고립을 예방하고,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돌봄을 지원하는 내용을 포괄한다. 즉 1인 가구를 새로운 가족 형태로 존중하고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셰어하우스나 공유주택이 1인 가구를 위한 좋은 주거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1인 가구가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는 새로운 ‘사회적 가족’이 형성되는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책적으로 청년 1인 가구에 저렴하고 안전한 임대형 셰어하우스를 제공하면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청년층에 현금보다 나은 복지 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에 취약한 독거노인에게도 공유주택은 좋은 주거복지가 될 수 있다. 몇 년 전 경남의 어느 지자체는 경로당 건물을 전면 개조하여 독거노인들을 위한 공동주택으로 만들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한 공간에서 제공하기도 용이하고, 혼자 사시던 분들의 외로움도 달랠 수 있어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일년이 지나자 이 공동주택은 새로운 요구와 도전에 직면했다. 어르신들이 함께하는 기쁨에 더하여 혼자만의 생활이 균형 있게 확보되기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 자율성과 정서적 유대감의 균형을 누리고 싶은 것이 남녀노소 불문, 우리 모두의 공통된 바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증가하는 1인 가구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만들어가도록 요구하고 있다. 폐쇄된 가족 구조와 주거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의 빗장을 열면 다양성이 존중되고 한층 더 열린 사회적 가족으로의 재구성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해체되어가는 그 자리에, ‘따로 또 같이’의 진정한 공동체성을 채워가는 창의적인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