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진짜 음지의 세계

입력 2020-12-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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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숙 한국재도전중소기업협회 회장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이제는 바뀌었지만 한때 한국의 정보기관이었던 국가안전기획부의 표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출판사 등 다른 조직 명함으로 신분이 위장돼 있었고 늘 조심스러워하며 불안해 보였다.

최근에 만난 사람. 최고 엘리트 길을 걸어왔지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대표이사 명의를 빌려줬던 자신이 채무불이행자가 되었다. 세금 등의 문제로 파산 신청도 할 수 없게 되자, 오랜 기간 임시직으로만 떠돌았다. 그런 고난의 세월에 비해 첫인상은 순수해 보였다. 그런데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어투는 신중했다.

헤어지면서 무심코 물었다. “집이 어느 쪽이에요?” 그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실제 사는 곳과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달랐기 때문. 압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집이 멀군요. 차로 한 시간도 더 걸리겠어요.”

걱정스런 마음에 말하던 순간, 아차 싶었다. 채무불이행자는 자동차 렌트도 어렵다는 걸 깜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주택가격 폭등 사태로 실거주 문제까지 불거졌다고 한다.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어디로 옮겨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 활력을 잃어버린 듯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진짜 음지의 세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걸.

신용에 문제 있는 사람들이 그간 가장 힘들어한 건 금융실명제였다. 실명으로 통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압류하기 가장 편한 게 통장 압류이니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가 없었다. 연고지가 없는 지역의 단위농협 통장을 만들어 쓰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단위농협 통장은 전산 시스템에 다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집이나 회사 근처 단위농협 이외 전국 수백 개에 달하는 단위농협 통장을 다 파악하는 건 물리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지역에 실제 살지 않으면 단위농협 통장을 만드는게 금지되었다. 일을 해도 통장으로 급여를 받을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법에서 정하는 일정 금액 이하의 급여는 압류 금지를 할 수 있지만, 급여 통장에 대한 압류 자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압류된 급여 통장에 대해 ‘압류금지 채권의 범위변경신청서’라는 사건 신청을 해서 압류 상태를 본인이 풀어야 한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기도 빠듯한 사람들이 이미 급여가 압류된 상황을 해결해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QR코드나 동선 공개 등 자신의 신분을 인증받아야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자신 명의의 휴대폰과 체크카드도 갖지 못하는 채무불이행자들은 더욱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됐다.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인증해야만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가속화될 디지털 인증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의 실명제가 기본이 될 텐데, 양지를 지향하는 실명제 시대에 여전히 음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용 소외자들은 어떻게 매달 살아갈 수 있을까.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려는 건 사람의 본능이며, 더욱 장려해야 할 사회적 가치고 원동력이다. 성실히 빚을 갚아나갈 시간이 너무 필요해 모든 빚을 탕감받는 파산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 파산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 파산을 선택해도 다시 면책을 받기까지의 오랜 기간을 채무불이행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 파산 후 다행히 면책이 됐더라도 5년간은 정상적 금융활동을 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

작년 이맘때 ‘대통령께 보내는 스칼렛 레터’란 칼럼을 통해 채무불이행자 숫자가 가족을 포함해 600만 명 이상일 것이라고 했을 때, 금융위원회에서 즉각 금융채무불이행자 숫자가 89.8만 명으로 줄었단 자료를 홈페이지에 공개했었다. 확인차 다시 금융위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지만 이때 공개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년간 이어져온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버티고 버티다 모든 걸 내다팔기 시작한 중소상공인들이 얼마나 더 음지의 세계로 전락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뜨끈해지는 연말인데, 12월 2일 확정된 내년도 예산 가운데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기술력은 우수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의 긴급경영안정자금과 사업구조 개편 후 재도전을 지원하기 위한 재도약지원자금이 1000억 원 삭감됐고, 재창업자금은 올해 예산 900억 원에서 더 이상 증액되지 못했다.

반면 내년도 창업지원 예산은 2조6342억 원으로 올해보다 늘었다. 3차 긴급재난지원금 3조 원을 새로 편성하면서 이를 위한 재원 마련으로 코로나19로 절대적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 지원 예산을 총 5000억 원을 가져갔다고 한다. 긴급재난지원을 위한 직접 지원도 중요하지만, 경제의 둑이 터지지 않게 하려면 중소상공인을 위기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주는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창업을 독려하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그렇게도 감이 안 잡히는가.

가속화되는 실명제 시대에, 음지의 세계가 점점 확대·재생산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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