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20년간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수출과 투자가 고전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금리를 제로로 낮추고 재정 지출을 통해 시장에 돈을 쏟아 붓고 있지만 소비도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시장에 돈이 흘러 넘쳐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저물가·저성장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 원인 중 하나로 물가 상승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세대의 심리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13일(현지시간) 분석했다. 현재 20세인 일본인들은 평생 평균 0.1%의 물가상승률을 경험해 본 게 전부다. 이들에게는 물가 상승이라는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황이다.
와타나베 츠토무 도쿄대학 교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태어난 세대는 인플레이션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서 “그래서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20~30대의 물가에 대한 관점은 아마도 평생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평생 인플레이션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저물가 기대치가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을 낳고 있다.
실제 물가가 조금이라도 오르면 사람들은 구매를 중단한다. 사람들은 최근 자신들이 경험한 가격에 근거해 미래 가격을 예측하는데 일본 소비자들의 경우 낮은 가격이 기억의 전부이기 때문에 구입을 꺼린다는 것이다. 조금 기다리면 물가가 낮아졌던 과거 경험이 가격이 더 낮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이에 소비가 줄어들면서 실제 물가가 더 하락하는 결과가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이 우려하는 일본화의 핵심이 바로 이 저물가의 장기화다. 연준은 물론 일본은행은 건전한 경제 성장을 위해 필요한 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2%로 잡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수년째 2%를 밑돌면서 일본을 집어삼킨 저물가의 덫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향후 물가를 끌어올릴 중앙은행의 수단이 줄어든 것도 이런 불안을 부추긴다.
일각에서는 일본 고용 시장에 훈풍이 불면서 임금이 상승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정작 임금 상승은 시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은행 저축으로 꼬박꼬박 쌓여간다. 은퇴 후 삶이 걱정된다며 소비를 줄이고 있는 탓에 임금 상승분이 물가를 끌어올릴 만큼 강한 수요세를 이끌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