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라가르드의 가장 급선무는 ECB 내부 결속으로 보인다. 8년 동안 재임한 드라기의 완화 노선 때문에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특히 유로존 내 입김이 가장 센 독일의 불만을 잦아들 게 하는 게 ECB 수장으로서 연착륙할 수 있는 최선의 길로 보인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ECB 사비느 라우텐슈레이거 이사가 갑자기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ECB에서 독일 출신으로는 연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임기를 2년 이상 남겨두고 그만둬 궁금증을 자아냈다.
라우텐슈레이거는 사임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ECB가 9월 12일 회의에서 인플레이션 목표치에 다가설 때까지 국채 매입을 재개한다는 결정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그것이 사임 이유라면 그는 국채 매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그만 둔 세 번째 독일인 멤버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앞서 2011년 5월, 당시 독일 중앙은행 총재였던 악벨 베버가 임기 도중임에도 사임했었다. 유로존 회원국의 중앙은행 총재는 ECB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에 참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12년에는 당시 ECB 이사였던 위르겐 슈타르크가 국채 매입에 반대해 사임했다.
민간은행이 ECB에 맡길 때 중앙은행의 예금금리를 마이너스(-)0.4%에서 0.5%로 인하하기로 한 ECB의 경기 부양책을 둘러싼 논쟁은 뜨겁다. 독일 등 북유럽 국가의 중앙은행 멤버는 ECB의 국채 매입 재개 결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심지어 독일 최대 타블로이드지 빌트는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사람들의 예금을 빨아들인다며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괴물 드라큘라에 빗대 ‘드라길라’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경제 자문위원인 이자벨 슈나벨을 라우텐슈레이거의 후임으로 지명했다. 독일 본대학 교수인 슈나벨은 앞에 그만둔 전임자들에 비하면 현실주의자에 가깝다고 한다. 독일 정계와 금융권이 “ECB가 모두의 돈을 훔쳐가고 있다”고 주장할 때마다 그런 발언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새로 ECB 총재에 오르는 라가르드에게 슈나벨처럼 유화적인 독일인이 이사에 취임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유로존의 최강국인 독일, 프랑스 중앙은행은 일제히 ECB의 경기부양 노선에 반기를 들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의 부담을 그대로 고객들에게 전가시킬 수 없고, 또 그만큼 마진이 압축되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리는 최악의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라가르드는 이런 반목 세력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급선무인 셈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라가르드가 ECB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라가르드가 ECB의 전략을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경기가 부양될 때까지 부양책을 펼친다는 계획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라가르드는 경제학자도 아니어서 드라기에 비해 유연성이 높을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다만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언론의 평가에 주목했다. 라가르드는 유럽 의회에서의 증언 당시, 일반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더 늘리고, 젊은 층, 그리고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자립해 비영리기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ECB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나 빌트는 “라가르드가 ECB 총재에 취임한다고 해서 저축을 하고 있는 독일인의 생활이 나아지느냐”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라가르드가 잘 해나갈 수도 있지만, 전임자인 드라기와 독일 언론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드라기가 ECB 총재에 취임한 8년 전, 빌트는 “토박이 프로이센 사람 같다”고 높이 평가하고, 독일 북부 프로이센풍의 투구를 씌운 드라기 사진을 게재했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그리스발 유럽 재정위기 전 “유로화가 붕괴 직전에 내몰리면 유로존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것”이라며 대규모 국채 매입을 단행했다.
이에 대해 빌트는 “더 이상 독일의 돈을 파산한 나라를 위해 쓰지 마라. 미스터 드라기”라며 프로이센풍 투구를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독일과 드라기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어긋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