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유전자가 다르더라도 민법상 친생자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판단이 나왔다. 1983년 7월 전합 판결을 통해 부부가 동거하지 않아 임신할 수 없는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유일하게 친생자 추정 원칙의 예외를 인정한 판례를 유지했다.
전합은 23일 A 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제기한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1985년 아내 B 씨와 결혼한 A 씨는 무정자증으로 자녀가 생기지 않자 1993년 다른 사람의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AID)을 통해 첫째 아이를 낳고 친자식으로 출생 신고했다. 이후 B 씨는 1997년 둘째 아이를 낳았다. A 씨는 무정자증이 치료된 것으로 착각해 둘째 자녀도 친자식으로 출생 신고를 마쳤다.
그러나 A 씨는 2013년 B 씨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친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다. 법원에서 시행한 유전자 검사 결과 A 씨와 두 자녀는 유전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민법 844조는 아내가 혼인 중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하도록 규정한다. 친생부인의 소를 통해서만 이를 깨트릴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는 제3자의 정자를 사용한 인공수정에 남편이 동의해 출생한 자녀의 경우 민법 844조에 따라 친생자로 추정되는지가 쟁점이 됐다. 또 부부 사이 동거의 결여뿐만 아니라 유전자가 달라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친생자 추정 원칙의 예외로 인정할 수 있는지도 심리됐다.
앞서 대법원은 1983년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한 경우에만 친생자 추정이 깨질 수 있다’며 예외사유를 좁게 인정한 바 있다.
1심은 “A 씨의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이상 친생자로 추정되며 무정자증 진단이 있다고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며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심은 첫째 자녀에 대해 “제3자의 정자를 사용한 인공수정에 남편이 동의한 경우 그 자녀는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된다”며 A 씨의 소송 제기가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둘째 자녀에 대해서는 “부부 사이 동거의 결여뿐만 아니라 유전자형 배치의 경우에도 친생자 추정의 예외가 인정된다”면서도 “비록 친생자 관계는 아니지만 유효한 양친자 관계가 인정되므로 A 씨의 소송 제기는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고 짚었다.
전합은 “헌법은 개인의 자율적 의사와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호하는데, 인공수정 자녀를 둘러싼 가족관계도 이러한 헌법에 기초해 형성된 것이므로 다른 자녀와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며 “출생과 동시에 안정된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 친생추정 규정의 취지는 인공수정 자녀에 대해서도 유지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남편의 동의는 인공수정 자녀에 대해 친생추정 규정을 적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므로, 나중에 자신의 동의를 번복하고 친생부인의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합은 둘째 자녀에 대해 “혈연관계 유무를 기준으로 친생추정 규정이 미치는 범위를 정하는 것은 민법 규정의 문언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민법의 취지와 체계에 반한다”고 밝혔다. 혼인 중 아내가 임신해 출산한 자녀가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친생추정 원칙이 적용된다는 취지다.
전합은 “원심 판단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나 결론은 정당하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