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시대에 서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는 가운데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고강도 물가잡기에 나서며 재계로 불똥이 튀고 있다. 일부 산업군은 '울며겨자먹기식' 또는 '알아서 몸낮추기'로 제품가 인하나 억제에 나서고 있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은 최근 물가 안정과 관련해 서민생활과 밀접한 품목에 대한 집중적인 관리를 천명하고 있다 이에대해 제지업계는 인상안을 철회했고 제분업계는 인하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향후 기타 산업군들에 어떠한 파급이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연이은 물가잡기 천명
7월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6%에 육박하며 9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과 관련 경제 정책 사령부인 기획재정부가 물가안정에 비상을 걸고 나서고 있다.
재정부는 지난달 말 정부가 물가안정을 위해 밀가루를 비롯한 41개 품목에 무관세를 시행한 데 이어 5일 김동수 재정부 차관 주제로 제4차 물가 및 민생안정 차관회의를 한국은행, 소비자원, 대한상의,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등을 포괄하는 민관합동회의로 확대해 개최한다는 방침이다.
재정부는 이 회의를 통해 수입물가 등의 상승이 소비자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7월 물가상승의 주원인이 되는 주요 품목별 수급 및 가격 동향 등을 점검해 나갈 계획이다.
경제 경찰인 공정거래위원회도 물가 안정에 초강수를 동원하고 있다.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5월부터 석유, 이통통신, 사교육, 자동차, 의료 등 5개 업종을 중점 감시 대상으로 선정해 모니터링 강화를 천명해 왔다.
지난달 말 공정위는 이들 업종에 가격담합과 상습위반 업체들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시사했다.
공정위는 상습적으로 법을 위반하는 업체는 퇴출당할 정도로 일벌백계하는 방안을 강구중으로 관련 규정을 정비해 10월부터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라면제조 업체들에 이어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이통 3사, SK,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 등 정유 4사, 롯데쇼핑, 신세계백화점, 현대백화점 등 백화점 3사와 삼성병원, 현대아산병원, 서울대병원 등 전국 45개 대형병원 들에 대해 한창 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가계의 사교육비 지출 급증에 따라 사설학원에 대해서도 학원비 담합 인상 여부와 교재비나 보습료를 부당하게 책정했는지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이동훈 사무처장은 최근 "5대 업종들을 감시하면서 서면 조사를 벌였고 현재 대부분 업종에 대해 현장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연말까지 조사를 마무리해 제재수위를 확정지을 것"이라고 전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4일 서민을 위한 부가가치세 경감 방안으로 라면, 세제 등 서민용 생활필수품에 대해 부가가치세(가격의 10%)를 되돌려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당정은 지난 6월 고유가 대책의 일환으로 총급여 3600만원 이하 근로자 980만명과 종합소득금액 2400만원 이하 400만명의 자영업자에게 연간 최고 24만원씩, 총 7조원의 소득세를 기름값 보조 명목으로 돌려주기로 한 바 있었다.
◆ 퍼런 서슬에 눈치 빠른 대응
이같은 정부의 입장에 일부 산업군들이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들이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관측들도 나온다.
최근 한솔제지, 이엔페이퍼, 무림제지, 남한제지, 계성제지 등 시장점유율 73%를 차지하고 있는 5개 제지업체들이 가격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 측의 요청을 수용해 가격 인상을 철회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정부가 가격 인상을 위해 담합 혐의를 잡아 조사를 벌이겠다는 엄포에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당초 이들 제지 5개사는 이달 1일부터 종이 공급가격을 15% 인상하겠다는 뜻을 각 수요처에 보냈지만 이를 확인한 지식경제부가 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가격인상 방침을 철회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경부는 이 자리에서 업체들이 가격인상을 강행할 경우 공정위가 담합 혐의로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는 방침을 전달해 제지업계가 인상안을 철회하게 됐다는 것이다.
제지사 한 관계자는 "원자재인 펄프가 지난 2005년 350달러에서 최근 800달러로 뛰었지만 원가상승분을 제품가격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원가 상승 부담을 덜기 위해 가격 인상 계획을 세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격 담합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분업체들도 최근 1년 사이에만 68.4%나 뛰었던 밀가루에 대한 가격 인하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한국동아제분이 지난달 말 밀가루 가격을 인하한다고 발표한데 이어 CJ제일제당, 대한제분, 삼양사 등 제분 빅4업체들이 가격 인하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제분업계에 따르면 국제 밀 수입 가격은 2006년 1월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해 현재는 2007년 1월 대비 2배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밀을 생산하는 미국의 경우에도 밀가루 가격이 2007년 1월 대비 210~250% 수준에 달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가격을 인하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최근 밀의 선물시세가 일부 조정을 받고 있으나 국내에 도입되는 밀 통관가격은 높은 수준임에 따라 제분업계는 원가부담이 가중되고 있으며 수입에 의존하는 사업 형태상 대규모의 환차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
제분업계 한 관계자는 "밀 통관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인해 원가부담이 가중되고 있지만, 물가 상승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일반 서민들의 어려움을 분담하기 위해 밀가루 가격을 인하키로 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정부의 밀가루 수입관세 인하 방침, 농수산물 유통공사를 통한 직접 수입 압박과 밀 시세 안정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이뤄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