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진행한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규제로 인해 우리나라가 겪을 수 있는 피해의 심각성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으로의 수출 관리 규정을 개정해 반도체 등의 제조 과정에 필요한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4일부터 강화했다. 규제 대상 목록에 오른 3개 소재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포토 레지스트 등이다.
단 한 개의 소재가 없더라도 생산 과정에 차질이 발생하는 반도체 산업 특성상, 일본의 규제는 우리나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소장은 “옛날 영화를 보면 나사 하나가 없어 로봇이 작동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한다”며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소재 수출 규제로 인해 반도체 전체 생산라인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포토 레지스트 규제 우리나라에 가장 큰 타격” = 우리나라는 그동안 반도체 소재를 해외에 많이 의존했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약 50%에 불과하다.
이 소장은 “소재는 단기간에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소재를 직접 만들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규제 또한 소재 국산화율이 낮은 데 영향을 끼쳤다고 이 소장은 답했다. 그는 “2012년 구미에서 발생한 불화수소 누출 사고 이후 관련 생산 공장을 건설할 때 진입 장벽이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이 소장은 포토 레지스트에 대한 수출 규제가 업체들에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포토 레지스트는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 공정에 사용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기준으로 포토 레지스트 전체 수입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91.9%에 달한다.
그는 “반도체 웨이퍼에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역할을 하는 에칭가스의 경우, 우리나라 중견업체들도 생산한다. 포토 레지스트는 이야기가 다르다”며 “포토 레지스트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어 다른 나라로부터 조달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업에서도 포토 레지스트를 생산하고 있지만, 일본과 비교했을 때 기술 수준은 아직 초기 단계라는 게 이 소장의 진단이다.
◇ “한일 갈등… 해외 경쟁 업체들엔 호재” = 이 소장은 수출 규제로 인해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했다.
그는 “이번 사태는 해외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엔 호재로 작용한다”며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세트업체들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경쟁사인 미국의 마이크론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론은 글로벌 D램 및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회사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 소장은 “일본이 이번에 규제한 포토 레지스트는 EUV(극자외선)용”이라며 “삼성전자와 미세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만의 TSMC가 반사이익을 얻는다”고 분석했다. EUV는 파장이 ArF(불화아르곤) 14분의 1 수준인 13.5나노에 불과해 미세공정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의 견제로 타격받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이 반등할 수 있다는 일각의 해석에 대해서 이 소장은 아직까지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다만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에 요청한 고객사들의 시스템 반도체 물량이 중국으로 갈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인력 적극 양성해야” = 일본이 규제를 발표한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WTO(세계무역기구) 제소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WTO 제소는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또한 “관계부처 TF에서 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중장기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WTO 제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소장은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겠지만, WTO 제소의 경우 소송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갈등이 지속된다면 기업이 입을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일본의 규제를 계기로 우리나라 소재 산업 분야에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작정 포토 레지스트, 에칭가스를 개발하기보다는 정부가 산업 전반의 생태계를 파악해 소재 분야의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또한 그동안 반도체 소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소재 기술 확보에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도체 인력도 적극 양성해야 한다고 이 소장은 설명했다. 소재 핵심 기술은 결국 사람이 개발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반도체 인재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며 “대규모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기업과 대학들이 논의하고 있는 반도체 계약학과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