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내가 믿는 것과 시장이 인식하는 것

입력 2019-06-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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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화 CMO캠퍼스 대표

기업 마케팅을 하다 보면 자주 부딪치는 고민 중 하나가 잘못된 시장 인식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제품은 분명 그렇지 않은데 시장은 그 가치를 몰라 주고, 좀 더 오래 사용하다 보면 실체를 알게 될 텐데 성급한 판단으로 호불호를 결정짓기도 한다. 경쟁사와 똑같은 원료로 만든 제품인데, 유독 우리 제품에만 까다롭게 굴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고, 이미 증명된 사실인데도 믿지 못하고 기존의 잘못된 인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휴대폰이 대중에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 LG 휴대폰은 잘 부서진다는 오명을 안고 있었다. 당시 한국 시장에서 인기 있는 휴대폰은 모토롤라 제품. 1990년대 세계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유지하다, 2000년대 들어서 노키아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있던 때였다. 자동차용 파워 서플라이 생산으로 시작한 모토롤라는 반도체 기술력을 앞세워 휴대폰도 제대로, 튼튼히 만든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투박해 보이는 디자인도 이러한 시장 인식 강화에 한몫했다. 가전 제품에서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뒤늦게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 LG는 경쟁사보다 내구성이 약하다는 시장 인식을 마주하고 있었다. 잠깐 떨어뜨렸는데 부서져 버렸다는 경험담이 블로그를 타고 다녔고, 액정 표준 규격이 나라마다 달라 생기는 현상이라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TV, 냉장고 만들던 회사가 휴대폰을 제대로 만들겠어?”라는 시장의 의구심도 한몫했다. 2000년대 초, LG 휴대폰은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LG 입장에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같은 소재, 더 증명된 외장 재료를 사용하고 디스플레이 품질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과학적 실험 결과를 공개하며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고도 싶었고, 대규모 소비자 경청회라도 열어 소비자들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고’ 싶기도 하였다. 몰라 주는 시장이 야속하고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면서 어떻게 이 판을 바꿀 수 있을지 전사적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LG가 꺼낸 카드는 ‘판단의 준거 기준’을 바꾸는 전략이었다. 내구성에 몰입되어 있는 시장의 인식에 동조해 우리 제품이 그 기준에 뒤지지 않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내구성 외에 더 중요한 기준이 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눈부시게 뛰어난 브랜드가 LG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블랙라벨 시리즈. 2005년 11월 비밀스럽게 개발되어 화려하게 론칭된 ‘초콜릿폰’이다.

이름부터 특이했다. 휴대폰이 초콜릿이라고? 딱딱한 시리얼 넘버가 휴대폰의 제품 브랜드를 대신하던 시절, 초콜릿이라는 서브 브랜드의 파워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휴대폰 두께가 마의 장벽이라 여겨지던 14㎜를 뛰어넘는 슬림형에 커버 액정은 온통 검정색, 전원 버튼도 보이지 않는 세련미. 한없이 예쁘고, 한없이 곁에 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카메라 화소는 여전히 경쟁사에 뒤졌고, 견고함과는 거리가 있는 외장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쿨한 모습의 초콜릿폰에 시장은 열광했다. 출시 3주 만에 하루 개통 수 1000대를 넘어섰고, 대리점마다 품귀현상에 시달렸다. 회의적이기만 했던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초콜릿폰은 단단히 그 역할을 해냈다. 유럽 최대 휴대폰 전문 판매 체인점에서는 초콜릿폰을 히트 예감 상품으로 꼽았고, 출시 직후부터 한동안 판매 1위를 고수하였다. 유명 디자인상을 휩쓸며, 휴대폰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6년 LG전자의 휴대폰 매출 실적은 전 분기 대비 30% 이상 성장했다.

인식은 바꾸기 힘들다. 마케팅 관점에서 시장의 인식을 정면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또 다른 오해, 더 강한 가설과 의심만을 던지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특정한 인식에 매달리는 브랜드를 보면서 “정말 그 기준이 중요한가 보다”라고 여기게 된다. 내가 피하고 싶은 전쟁터에 나 스스로 소비자들을 몰아넣는 꼴이다.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시해 그쪽으로 시장의 관심을 돌려야 한다. 초기 시장에서 패색이 짙었을 때 LG가 택한 전략은 내구성이라는 기존 판단 준거에 휘둘려 자신을 설명하거나, 더 단단해 보이는 제품을 내놓고 홍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판단의 기준, 더 중요할 수 있는 구매 결정 기준인 ‘디자인’을 시장에 제시하였다. 그것으로 소비자의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그들의 숨겨진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내구성 따위는 잊어 버려, 중요한 건 예쁜 휴대폰이야. 네 곁에서 항상 함께하며, 네 손길 끝에 머물 수 있는, 휴대폰은 또 다른 너의 모습이거든.” 초콜릿폰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알거나 믿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오직 인식만이 사실이다. 내 브랜드가 칙칙하고 답답하다면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내 제품이 왠지 불편하고 약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출발점은, 시장의 인식만이 내가 고려해야 할 유일한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을 바꾸는 게임이 아닌, 다른 판을 벌여 내게 유리한 인식을 형성시키는 게임을 벌여야 한다. 시장을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오직 유혹할 수 있을 뿐이다. 인식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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