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대형은행 UBS가 중국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수석 이코노미스트에게 휴직을 권고한 가운데 중국의 눈치를 지나치게 본 행동이라는 비판이 월가에서 나오고 있다.
1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UBS는 ‘중국 돼지’ 발언으로 중국인의 반발을 산 폴 도너번 글로벌자산관리부문 수석 이코노미스트에게 회사가 관련 문제를 검토하는 동안 휴직을 권고했다.
도너번은 지난 12일 보고서와 자신의 팟캐스트를 통해 아프리카돼지열병 때문에 중국 소비자 물가가 올랐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에 쓰이는 용어 ‘swine’ 대신 ‘pig’를 썼다. 그러면서 “중국 소비자 물가가 상승한 주요 이유는 병에 걸린 돼지들”이라며 “만약 당신이 중국 돼지(Chinese pig)이거나 중국에서 돼지고기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중요한 일이겠지만, 중국 밖 다른 나라엔 별 문제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발언 직후 중국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도너번이 중국 물가상황을 분석하는 보고서에서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썼다”며 날을 세웠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중국인을 모욕했다”며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금융기관들을 중심으로 ‘UBS 보이콧’을 줄줄이 선언했다. 중국 3대 증권사 중 하나인 하이퉁국제증권의 린융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위챗 계정과 사내 이메일을 통해 “하이퉁국제증권 글로벌 사업부는 UBS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홍콩 내 124개 중국계 금융사로 구성된 홍콩중국계증권업협회(HKCSA)도 ‘UBS 보이콧’을 선언했다. HKCSA는 UBS 이사회에 공개서한을 보내 중국인 비하 발언을 한 이코노미스트를 해고하고 발언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상황이 악화하자 도너번은 “문화적으로 부적절한 단어를 쓴 것은 실수이고, 악의는 없었다”며 “오해에 대해 전적으로 사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중국의 반발이 계속되면서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UBS는 “이번 발언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며 “도너번에게 회사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 동안 휴직하도록 권고했다”며 진화에 나섰다.
UBS가 사실상 백기투항에 나서자 이번엔 월가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다.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중국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키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선, 미중 무역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유럽 은행에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며, 하이퉁국제증권이 라이벌인 UBS를 경계하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 또 소셜미디어에서 중국인의 격분을 부추기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UBS의 라이벌 금융기관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신중히 판단하지 않고 26년 경력의 전문가를 퇴출시킨 것은 지나친 처벌이라는 주장이다. 나아가 월가는 중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소셜미디어의 국수주의적 캠페인에 쉽게 꼬리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