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인문학] 막말이 넘치는 사회

입력 2019-06-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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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럼니스트

요즘 정치인들의 막말로 세상이 시끄럽다. 막말에는 여당·야당, 진보·보수가 따로 없는 듯하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를 비하하는 ‘달창’ 발언을 했던 데서부터 헤아려 보자. 그 며칠 후 같은 당의 어느 의원은 문 대통령을 ‘한센병 환자’에 빗대는 발언을 했다. 여당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당 대표는 상대 정당을 ‘도둑놈’이라고 지칭했다. 한 야당 대표는 제1야당 대표를 ‘사이코패스’라고 못 박기도 했다.

말의 전문가인 정치인들이…

자유한국당의 정책위원회의장은 지난달 말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야만성에는 몸서리가 쳐지지만, 그런 야만성·불법성·비인간성을 뺀다면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자로서 더 나은 면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처럼 ‘김정은 우위설’을 주장하면서 김 위원장의 ‘김혁철 처형설’을 거론하고 이를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다음 한국의 문제 많은 외교·안보 진용을 바꾸지 않고 있는 문 대통령보다 ‘신상필벌’을 단호하게 실천하는 김 위원장이 낫다고 결론지었다.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내용을 명확한 사실인 양 전제한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외교관 처형을 ‘신상필벌’로 규정하고 문 대통령과 비교한 것은 그야말로 막말 중의 막말이었다.

정치인은 말의 전문가다. 자신과 소속 정당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거나 경쟁 상대인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해 비판하고 국민을 설득할 때 언제나 말을 통해서 하지 않는가. 또한, 정치인은 말의 장인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 문학가와 다르지 않다. 단어를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들여 다듬어 내놓아야 한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지지층 결속 효과 있다고?

의아한 것은, 인기의 오르내림이나 발언의 영향에 늘 신경 쓰는 영리한 정치인들이 왜 이처럼 막말을, 그것도 자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막말이라는 한 단어로 묶었지만 그것은 독설이나 욕설, 극단적 혐오 표현, 심지어 쌍소리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막말을 하는 생각의 저변에 혹시 막말이 비판의 한 수단, 그것도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막말의 사전적 의미는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하는 말”이다. 한편, 비판(批判)의 사전적 의미는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이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비판은 아무리 강한 경우에도 이성적 분별, 즉 설득력 있는 논리로 무장돼야 함을 알 수 있다. 비판 대상을 향해 틀렸다, 글러 먹었다고 거세게 공격할 때 왜 그러한지 대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논리가, 타당한 근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비판은 참된 비판이 아니라 한낱 막말이나 욕설, 비난, 비방에 불과하다. 무절제한 감정적 언어의 배설일 뿐이다. 광범위한 설득력과는 거리가 먼 욕설, 원색적인 언어 배설에 상대방이 거세게 반발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가는 말이 곱지 않은데 오는 말이 고울 수 있겠는가.

시민의 의식수준에 대한 착각!

딴 건 몰라도 욕설이나 독설이 지지층 결속에는 효과가 크지 않을까? 강한 일체감을 공유하고 있고 감정적으로 들떠 있는 군중에게 영합하는 막말을 퍼부으면 즉석에서 뜨거운 환호와 갈채를 받을 것이다. 이런 반응을 지지층 결속이라고 한다면 막말의 효과가 다소간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런 집회에 적극 참여하는 군중이 아닌 많은 일반 시민은 공개적으로 표현된 막말을 보다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저울질한다. 막말이 표 모으는 데 효과적이라고 여긴다면 합리적 유권자 다수의 판단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시민의 의식 수준을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맹목적 지지자들의 박수와 환호로 인해 결집되는 표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신중한 잠재적 지지자들의 표도 적지 않게 날아가 버린다. 상당수 유권자들은 초보 정치인들이 짐작하듯이 그리 멍청하지 않다. 막말은 득표 전략으로서도 득(得)만큼 실(失)도 큼을 정치인들은 알아야 한다.

막말 뒤에는 짧지만 후련함, 속 시원함을 맛보게 하는 ‘사이다 같은’(!) 면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사람 마음에 이성과 감정이라는 두 요소가 있고 보면, 분노나 감정적 응어리를 발산하는 일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는 말이다. 막말도 전연 쓸모없지는 않다는 소리다. 사소하지만 일종의 배설에서 오는 일시적 만족감이다.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다.

적대감 증폭, 스스로를 타락시켜

생각이나 느낌, 경험과 언어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언어는 사상이나 경험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 대해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와 벤저민 워프(Benjamin Whorf), 두 학자는 흥미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른바 ‘사피어-워프의 가설’이다. 이들에 따르면 언어란 단지 생각이나 경험을 전달하는 표현 수단에 그치지 않고 언어 자체가 일종의 판단 기준을 지닌 힘으로써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 즉 언어는 무의식 속에 투사된 내적 세계를 경험 세계로 끌어올림으로써 실제의 경험을 규정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쉽게 말하면, 말은 생각이나 경험을 표현할 때 동원되는 수단이라는 성질만 지닌 게 아니라 생각이나 판단 자체를 변화시키는 자체적인 숨겨진 힘을 갖고 있다는 소리다.

이 가설에 주목하게 되는 점은 말이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결정짓기도 한다는 사실에 있다. 막말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을 표현하느라고 막말을 내뱉지만, 내뱉은 그 막말이 발언자 스스로의 분노나 증오감을 증폭시키는 잠재적 위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막말은 결국 자신을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고 만다. 막말이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이다. 막말을 별스럽지 않게 보는 통념에 대한 강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정상배와 정치인을 구분하는 기준

정치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는 폴리티션(politician)과 스테이츠먼(statesman)이 있다. 좀 더 구분이 필요한 경우, 대체로 폴리티션은 정상배나 정치꾼으로, 스테이츠먼은 정치인으로 옮긴다. 이 두 부류의 정치인을 구분하는 다른 방법을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막말과 비판을 동일시하여 툭 하면 막말을 내뱉는 정치인과, 이 두 가지가 판이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할지언정 막말은 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대별하는 것이다. 전자를 폴리티션, 후자를 스테이츠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도 막말이나 막말 가까운 언사를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는 잊힐 만하면 저급한 독설을 내뱉는다. 그것도 반지성적 사고의 징표라고 해도 좋을, 흑백 논리나 지나친 단순화,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를 상습적으로 동원하면서. 최근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내보인 저열한 언설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의 경박한 언설 행보는 그가 사유의 심도나 인격 면에서 실로 초라한 수준임을 드러낼 뿐이다.

사회 일각에는 막말이나 악담, 욕설, ‘악플(악성 댓글)’을 표현의 자유나 평소 누적된 공격 욕구 해소의 한 방편으로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안이하고 무책임한 관점이다. 별 잘못도 없는 일반 시민이 누군가의 왜곡된 공격욕의 표적이 되게 방치하는 건 건전한 사회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막말은 반발과 거부감을 불러오지만, 그 못지않게 막말하는 사람 자신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비판을 못하겠으면 막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 그래야 적어도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자극하거나 자신의 품격을 스스로 타락시키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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