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코끼리'의 공포…정책전환 없으면 '속수무책'

입력 2019-03-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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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실적부진 공시ㆍ무디스ㆍKDI 경고에 눈 뜬 정부..앞으로 대책이 명운 가른다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가 마침내 한국경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성전자가 이례적으로 올 1분기 실적이 기대를 밑돌 것이라고 밝힌 것이 의도적 맹시(盲視)였던 정부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검은 코끼리는 ‘블랙 스완’과 ‘방안의 코끼리’를 합성한 조어다. 언젠가 검은 백조와 같이 엄청난 파장을 낳을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 해결하지 않는 문제를 일컫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제계에서는 반도체가격 하락, 미.중 무역분쟁, 수출부진, 투자축소 등에 따른 경기둔화를 경고해 왔지만 정부는 이런 ‘리스크’에 안이하게 대응해 왔다. 오히려 경제심리 위축을 막는다며 ‘낙관론’을 펼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실적부진 예상 공시, 세계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한국경제 리스크 진단 등이 연이어 나오면서 이제야 정부는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다.

특히 정부는 그동안 추가경정예산을 산업구조개선보다는 일자리창출과 각종 복지성 예산으로 책정해 왔다. 이에 따라 향후에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진중한 선회방침을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 젤레노그라드에 있는 미국 최대 반도체 메모리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반도체 공장 생산 라인이 가동 중이다. 모스크바/TASS연합뉴스
▲모스크바 젤레노그라드에 있는 미국 최대 반도체 메모리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반도체 공장 생산 라인이 가동 중이다. 모스크바/TASS연합뉴스

◇예상보다 큰 충격 예고한 삼성전자=26일 삼성전자는 올 1분기 실적전망에 대해 "당초 예상보다 디스플레이와 메모리 사업의 환경이 약세를 보임에 따라 올해 1분기 실적이 시장 기대 수준을 하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디스플레이 사업에 대해서는 "LCD 패널의 비수기 속 중국 패널업체의 설비 증설로 인한 공급 증가로 당초 예상 대비 가격 하락폭이 확대됐다"면서 "플렉서블 올레드 대형 고객사 수요가 감소하고 LTPS(저온다결정실리콘) LCD와의 가격 경쟁 지속으로 수익성이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또 메모리 사업의 경우 "비수기에 따른 전반적인 수요 약세 속에서 주요 제품들의 가격 하락폭이 당초 전망 대비 일부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증권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이 10조 원은커녕 6조원대로 떨어질 것이란 비관론도 나왔다.

삼성전자가 이 같은 실적우려 공시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방증이다.

◇무디스, 한국경제 리스크 뚜렷=여기에 무디스도 기름을 끼얹었다.

이날 무디스는 올해 한국 기업이 대체로 안정적인 신용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리스크는 뚜렷하다고 진단했다.

유완희 무디스 부사장 겸 선임 크레딧 담당관은 무디스 신용등급이 부여된 한국 비금융기업에 대해 "대부분 올해 꾸준한 이익 창출과 제한적인 차입금 증가로 안정적인 재무 레버리지를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동차, 유통, 정유, 화학, 통신 등 여러 업종 기업의 조정 EBITDA(법인세·이자·감가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가 다소 증가하지만 자동차와 유통산업은 부진한 수익성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한국 기업의 하방 리스크 요인으로는 미중 무역갈등, 원화 평가절상, 유가 상승, 예상보다 부진한 업황 등을 꼽았다.

유 부사장은 "미.중 무역분쟁은 한국 기업에 제한적인 범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나 미국의 잠재적 수입차 관세 부과가 한국 자동차에 적용되면 한국 자동차 산업에 상당히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특히 올해 전자·반도체 기업의 이익이 작년 대비 상당히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기업의 우수한 재무적 완충력이 이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악화된 실적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다.

이미 무디스는 '세계 거시 전망 2019∼2020' 보고서에서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로 올해 2.1%, 내년 2.2%로 예상한 바 있다. 지난해의 2.7%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애초 정부 전망치인 2.6%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KDI, 경제 낙관론 조심스럽다=김현욱 KDI 경제전망실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위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한국경제는 올해 2.6% 성장할 것이라고 지난해 12월 전망했는데, 이보다 조금 낮은 성장률이 나타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국내 경제와 관련해선 "지난해 4분기 성장은 상당 부분 정부 지출이 기여했고, 민간기업 투자가 상당히 안 좋다"며 "민간소비는 과거에 비해 나쁘지는 않지만, 힘이 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소비와 관련해 "낙관적 평가를 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정책방향 전환 절실하다= 이에 정부는 내년에도 확장적 재정운용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예산은 올해 470조원에서 내년에는 50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이는 내년에도 투자와 수출부진이 지속되고 고용과 분배 등 민생경제 난제도 개선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장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사진)은 지난 24일 혁신경제 역동성 제고 부분을 위해 성과의 가시화가 필요하다며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을 가다듬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업계 관계자 등 다양한 전문가를 포함해 만났다"며 "생태계 강화, 반도체 대학 학과 등 인력 양성, 수요 기업과 반도체 기업과의 상생협력 등에 중점을 둬 대책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 "바이오·헬스에 대해서도 복지부, 산업부, 과기부 등과 협업해 종합 대책을 준비 중"이라고 부연했다.

재계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노동유연성 제고 정책과 규제혁신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실적 우려, 무디스의 한국경제 리스크 분석 등은 결코 그냥 이벤트성으로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다”진단했다. 이어 “정부가 지금이라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경제살리기에 올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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