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팔꿈치 부분을 가죽으로 덧댄 코르덴 재킷은 검정색 교복을 막 벗은 대학 신입생의 교복이나 다름없었다. 그 교복을 입고 고전읽기 서클(동아리)에 찾아간 적이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불온한 선배들에게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신입생의 동아리 가입을 대학이 금하던 시절이었다.
쪽지에 그린 약도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간 달동네, 담배 연기 자욱한 두세 평 남짓한 방을 빼곡 메운 대학생들은 일본어로 된 경제학 책을 독회하고 있었다. 그때는 합창반이나 법철학회도 모두 같은 책을 읽었다.
사법시험을 본격 준비하기 전 철학, 고전, 교양을 맛보고 싶었던 신입생의 원대한 계획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으로 끝난 채 법전에 빨려 들어갔다. 3년간의 군법무관 시절, 비교적 한가했던 기간, 주말에 서울에 올 때면 매주 한 권씩 독파하리라는 계획으로 교보문고에 들렀으나 한 주 한 권 구매로만 끝나고 말았다.
서른 넘어 뒤늦게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수학박사로서 법학을 전공한 박사지도교수는 자기와 함께 공부하려면 다섯 편의 논문을 읽고 오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칸트, 헤겔, 로크, 벤담 등의 철학을 법학에 접목시킨 것들이었다. 대체 이런 철학이 저작권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대학 4년 동안 우리말로 된 책을 읽으면서도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외국어로 쓴 논문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여러 서클을 기웃거리다 천편일률에 질리고 두 번의 수강 신청과 철회가 말해주듯 법철학 강의에 대한 실망감은 철학 공부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제때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은 오랜 상흔으로 남듯, 철학은 내게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네이버 문화재단이 2014년부터 6년째 진행하고 있는 ‘열린 연단: 문화의 안과 밖’ 강좌 시리즈는 철학, 문학, 과학 등 고전과 현대 사상에 대해 매주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강연을 하고 강의 영상과 원고가 인터넷에 공개된다. 이 공개 강좌는 기업의 모범적 사회공헌 사업의 하나로 입소문을 타 꽤 많은 사람이 듣고 있다.
산책 중에 이어폰으로 강좌를 듣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잠시 멈춰 메모하느라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린 때도 있다. 청강으로 얻은 지식을 계기로 책을 읽으면 쉽게 이해되기도 해 강의의 유용성을 절감한다.
이처럼 공부의 기쁨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이런 걸 대학 때 배웠더라면…’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그랬듯 지금 대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대학에서 기초교양교육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다. 대가(大家)라 할 수 있는 학자들이 신입생들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교육을 담당해야 한다. 좁고 깊은 부분을 다루는 강의는 오히려 박사학위를 갓 취득한 신진 학자가 해도 무방하다. 세미나 수업이나 소규모 심층강의는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학의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놀아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돈 버느라 바쁜 아빠는 “다음에”라는 말로 외면한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된 아버지가 이제 좀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려 하지만 닫힌 방문 사이로 들려오는 건 자녀의 “됐어요”라는 말뿐이다.
철학이나 교양에 관한 대학 교육의 현실이 이런 가정의 엇박자와 무엇이 다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