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자도 읽다 지친 보험사 약관

입력 2018-10-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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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현 금융부 기자

2금융에 발령받기 전 내 보험 선택의 기준은 믿을 만한 설계사였다. 부리, 심신상실 등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해야 읽을 수 있는 약관은 나에게 그저 설계사 번역이 필요한 ‘딴 나라’ 언어일 뿐이었다. 출입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내 보험증권 하나를 정독하지 못했다. 작심하고 들여다보는데도, 좀체 속도가 안 붙는다.

보험 약관이 어려운 이유는 법률 용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 표현을 가져오다 보니 한자를 그대로 번역해 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보험사 자체적으로 △사망 시→죽을 경우 △상해를 입으면→다치면 등 순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객 눈높이를 맞추기엔 역부족이다. 보험 재무제표를 이해하는 회계 전문가를 찾는 일이 ‘하늘에 별 따기’란 말이 괜한 말은 아니다.

최근 보험업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즉시연금 미지급 사태도 이 ‘암호문’ 수준의 약관에서 비롯됐다. 즉시연금은 가입자가 한꺼번에 목돈(보험료)을 내면 보험사가 이를 운용해 매달 이자를 생활연금으로 주고, 만기 때 원금을 돌려받는 상품이다. 그런데 이 돈에는 위험보험료와 사업비가 제외돼 있다.

삼성생명을 비롯한 일부 보험사들이 약관에 ‘연금지급 시 만기보험금 지급 재원을 공제한다’는 내용을 담지 않았다. 금융당국이 고객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돈을 돌려주라고 권고했는데도 보험사들은 보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되레 금융감독원장을 타박하고 있다. 그리고는 고객에게 법대로 하자고 따진다. 거대 보험사를 상대로 법적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삼성생명을 상대로 민원을 넣었던 한 고객은 회사 측이 소송을 제기하자 민원을 철회했다.

보험은 한번 가입하면 20년 이상 유지해야 하는 장기 상품이다. 가입서에 서명하는 순간, 고객은 갑에서 을이 돼버린다. 보험사를 믿고 가입한 ‘약자’에게 법리적 잣대를 들이민다면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고객 눈높이를 맞추려는 보험사들의 노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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